[기자수첩] 구직 포기 백수 400만명 시대 낳은 글로벌 경쟁과 한국식 눈치 문화
구직 포기한 대졸자 405만명, 전체 비경제활동인구 중 25% 넘어
기업들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며 고급 일자리 제공하기 어려운 것도 원인
글로벌 인재 대비 국내 인재들의 역량 부족에 대한 지적도
한국식 눈치 보기 문화로 인한 지나친 대기업 선호 경향도 문제라는 지적
21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월평균 대졸 이상(전문대 포함)의 학력을 가진 비경제활동인구는 405만8천명에 달했다. 청년·고학력자 중심으로 구직 활동을 중단한 사람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어 노동시장 활력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비경제활동인구 중 대졸자 비중은 25.1%로 처음 25%를 넘어섰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월평균 대졸 이상 청년층(15∼29세) 비경제활동 인구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000명 늘어난 59만1,000명이다. 통계청은 고학력 비경제활동 인구 비중은 20대 후반을 중심으로 늘고 있고, 최근 직장을 다닌 적이 있거나 구직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은, 이른바 ‘단기 비경활’ 비중이 높다는 설명이다. 반면 인사 및 경제 전문가들은 이직을 위한 단기 마찰적 실업 수준을 넘어, 한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깔려있다는 지적들을 내놓는다.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는 한국 기업, 일자리 잃는 한국 인재들
‘구직 포기 백수 400만’이라는 통계청 보도가 나오자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연봉 체계나 인사 조직 구조, 기업의 비전 등, 구직자를 유인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기업들이 거의 없다는 지적들이 터져 나왔다. 일부 구직자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못 갈 경우에는 차라리 취직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의견들에 공감대가 장기간 형성되어 있고, 급여 수준이 낮은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최근 고금리로 성장세가 고꾸라진 스타트업들에 취직하는 것도 거부하는 세태가 관측됐다.
경제 전문가들은 글로벌 시장이 열리면서 한국 기업들 중 경쟁력이 부족한 기업들이 시장을 뺏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국내에서 수출 시장 경쟁력을 갖춘 제품들이 반도체, 자동차를 비롯한 일부 품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채용되는 분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외 직군으로는 국내 시장만 상대하거나, 글로벌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만큼 상품의 가격 경쟁이 낮은 급여 수준으로 이전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기업 경쟁력 약화의 원인으로는 기업들의 투자 축소, 기술 도전 포기 등과 함께 인력들의 역량 부족, 교육 정책 실패 등도 함께 지적된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인력을 길러내는 고급 교육을 포기하고, 대학 입시에 초점을 맞춘 점수 취득형 교육이 팽배한 문화, 단순히 연구 실적을 쌓기 위한 연구가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점 등이 주요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인재들의 역량 부족, 탈출구는 교육 혁신
글로벌 시장 전문가들은 한국 인력들이 대학 교육을 받은 것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지고 독해력, 주의 집중력 등의 주요 노동 생산성 지표에서 낮은 수준을 보이는 것을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한다.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로 직원의 경쟁력 강화가 뒤따라야 하지만, 전문성을 갖춘 고급 인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AI 교육을 운영했던 스위스AI대학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의 주요 명문대 공학 대학원 과정을 거친 학생들마저도 석사 과정 입학 시험에 합격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통계학 등의 일부 전공 출신자들 중 교육 흡수 속도가 빠른 일부 학생들만 교육 과정에서 생존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약 3년간 한국 학생들을 모집하고 얻은 내부 자료를 바탕으로 더 이상 한국 학생을 받는데 학교의 자원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설명도 더했다. SKYPK로 불리는 한국 최고 명문대의 자연과학 대학원 과정을 마쳤어도 서구 명문대의 대학원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인 만큼, 가능성이 높은 인재들을 보유한 국가들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교육 관계자들은 국내 대학이 교육 품질 고급화를 위한 시도를 여러 차례 진행했지만 현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며 동력이 상실된 상태라고 지적한다. 지난 2011년 1월부터 4개월간 학부생 4명이 자살하는 이른바 ‘카이스트 사태’가 발생하자 결국 카이스트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모셔왔던 서남표 총장이 사실상 불명예 퇴진을 했던 사례가 그 중 하나다. 서남표 총장은 당시 카이스트의 교육 수준이 크게 낮은 점을 지적하며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러나 전면 영어수업에 반발하는 교수진, 징벌적 등록금 제도에 반발하는 일부 학생들의 시위를 거치며 개혁의 동력을 잃었다. MIT로 돌아간 서 총장을 만나본 관계자들에 따르면, 서명을 해 달라고 찾아가는 박사생들에게조차 “한국 돌아갈 생각이냐?”는 질문을 던지며 한국 귀국 의향이 있는 학생들을 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불쾌한 사건들이 많았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식 눈치 문화도 한 몫
인사 관계자들은 한국식 눈치 문화가 ‘구직 포기 백수 400만’ 시대의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의 주요 인기 직장을 가지 못했으면 ‘패배자’라는 한국식 낙인을 피하기 위해 취업 재수, 삼수를 반복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나타난 수치라는 것이다. 과거 S대 등의 주요 명문대 학생들에게서만 보이던 행태가 대학가 전반에 확산됐다는 설명이다.
한 인사 관계자는 “심지어 더 고액 연봉을 주는 중견 기업, 전망이 밝은 직군, 외국계 기업보다 대기업 집단 중 가장 급여 수준이 낮은 직군에라도 가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한국, 일본 등 일부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채를 통해 채용된 인력들 간의 ‘동기 문화’ 같은 요소들이 급여 및 직군의 전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인사팀 경력 15년이라고 밝힌 한 관계자는 “채용 시점에 이미 직원 평가가 끝난 상태”라면서 “같은 대기업 집단에 입사해도 그룹 내에서 인식하는 중요도가 다르고, 주어지는 보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 회사들처럼 번호를 정해서 퇴직시키는 것은 아니자만, ‘턱걸이’라고 분류된 인력들은 대체로 가장 빨리 명퇴(명예퇴직) 리스트에 올라간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