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세안 ‘포괄적 전략동반자’로 격상, 중국 견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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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 관계 수립 35년 만에 격상, 한일중 모두 아세안과 최고관계로
안보·경제·사회 3대 분야서 협력 강화, 아세안 미래 인재 4만 명 육성도
일본도 아세안에 인적 교류·에너지·디지털 분야 등에서 협력 추진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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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포괄적전략동반자관계’(CSP·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를 수립했다. CSP는 아세안이 대화 상대국과 수립하는 최고 단계의 파트너십으로 한국은 호주, 중국, 미국, 인도, 일본에 이어 아세안의 여섯 번째 CSP 체결국이 됐다. 이를 토대로 우리 정부는 남중국해를 비롯한 아세안 지역에서 해상 무역의 안전을 확보하고, 핵심 광물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대화 관계 수립 35년만 ‘최상위급 파트너십’

10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은 라오스 국립컨벤션센터(NCC)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한·아세안 관계를 CSP로 격상하기로 아세안 정상들과 합의했다. 한·아세안 정상들은 이를 계기로 최초의 대면 한·아세안 국방장관회의를 개최하는 등 안보·경제·문화 측면 교류를 다방면에서 강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국과 아세안은 1989년 ‘부분 대화 관계’를 수립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전면 대화 관계’, 2004년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 등으로 지속 발전해 왔다. 2010년에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됐고 이후 14년 만에 CSP로 아세안이 회원국 이외 국가와 맺는 최고 수준의 협력관계가 된 것이다. 아세안의 11개 대화 상대국 중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은 국가는 미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에 이어 한국이 6번째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의 모두발언에서 “한국이 아세안과 대화 관계를 맺은 1989년 이후 교역은 23배, 투자는 80배, 인적 교류는 37배 이상 늘었다”며 “이러한 최고 단계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한국과 아세안은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함께 써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과 아세안 정상들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오는 11월 한·아세안 국방장관회의를 최초로 대면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또 한국 퇴역함의 아세안 양도, 사이버 안보 역량 강화 지원 등을 통해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경제 측면에선 경제·통상 분야 연구기관 간 정례 협의체인 ‘한·아세안 싱크탱크 다이얼로그’를 내년에 출범시켜 급변하는 통상 환경에서 공조하자고 제안했다. 또 2028년까지 3,000만 달러(약 400억원)가 투입될 아세안 디지털 혁신 플래그십, 스마트시티 관련 협력 등도 조속히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사회·문화적 차원에선 향후 5년간 아세안 출신 학생 4만 명에 대한 연수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내년에 이공계 첨단 분야(STEM, 과학·기술·공학·수학) 장학생 사업을 발족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3년 연속으로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하며 접촉면을 늘려왔고, 2022년에는 아세안 특화 협력 전략인 ‘한·아세안 연대 구상(KASI)’을 내놨다. 이어 아세안 관련 협력기금 연간 기여액을 2027년까지 4,800만 달러(약 650억원)로 늘리겠다고 공표하는 등 아세안 지역에 공을 들여왔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관계 격상으로 이 같은 구상을 실질적으로 발전시킬 동력을 확보됐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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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이 미국이 아닌 중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설문조사 결과/출처=ISEAS-유소프이삭연구소

아세안 내 중국 영향력 확대

그간 아세안 지역은 경제·안보 등 전략적 중요성에도 미국·중국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글로벌 관계가 요동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중 무역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데다, 2개의 전쟁까지 맞물려 원자재 확보와 수출 시장 확대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구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대규모 소비 시장까지 갖춘 아세안은 한국의 중요한 경제 협력 동반자다.

여기에 더해 미국 등 서방의 대중국 견제에 맞서 중국이 아세안과의 밀착을 더욱 고도화하고 있다는 점도 한-아세안 관계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1991년 아세안과 대화 관계를 구축하고 역외 국가로는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우호협력조약(TAC)’에 가입했다. 이후 중국과 아세안 양측의 무역금액은 83억6,000만 달러(약 11조3,000억원)에서 2023년 9,117억 달러(약 1,230조원)로 무려 100배 이상 증가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5년 연속 아세안 최대 교역 상대국을 유지했고, 아세안도 올해까지 4년 연속 중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자리했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중국의 대아세안 수출입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해 중국 전체 교역의 15%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아울러 올해 7월 기준 현재 양측 간 누적 투자 규모는 4,000억 달러(약 540조원)를 돌파한 상태다.

중국과 아세안 협력이 성과를 거둔 것은 양측의 지리적 접근성과 인적·문화적 상호 연결 덕분이며 특히 양측이 시대적 발전 흐름에 적극 순응해 정확한 역사적 선택을 한 데서 힘입은 바가 크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기소물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의 동방 문화와 서로 평등하게 대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것은 중국과 아세안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다. 이 같은 의식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일대일로)’ 공동건설을 제안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중국-라오스 철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 중국-인도네시아 및 중국-말레이시아 ‘양국 산업단지’ 등 상징적 프로젝트가 잇따라 건설됨에 따라 각국 국민들이 발전의 혜택을 누리며 공동체라는 인식도 깊어진 것이다.

이처럼 양측 간 협력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아세안의 중국 선호도도 높아지고 있다. 싱가포르의 동남아연구기관인 ISEAS-유소프이삭연구소(ISEAS-Yusof Ishak Institute)가 올해 초 시민사회 활동가, 언론종사자, 학자,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중 갈등 국면에서 미국보다는 중국과의 동맹을 선호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응답은 지난해 38.9%에서 50.5% 상승한 반면, 미국을 선택한 비율은 지난해 61.1%에서 49.5%로 하락했다.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 중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에서 중국과 동맹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지난해보다 증가했다. 아세안에서 중국 선호도가 높아진 이유는 중국의 무역과 투자 혜택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베트남과 필리핀에서는 미국에 대한 선호도가 상승했는데, 이는 이들 국가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빚고 있는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면 미국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 아세안 협력 파트너로서의 차별화 도모

일본이 아세안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것도 아세안 내 중국 영향력 강화를 우려한 행보라는 게 중론이다. 여기에 아시아 지역에서의 중국 독주를 막을 서태평양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한국, 대만과 더불어 아세안의 참여가 필수라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 위해 일본은 일본국제협력기구(JICA·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를 통한 공적개발원조(ODA)를 중심으로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제로에미션공동체(AZEC·Asia Zero Emission Community), 베트남 및 인도네시아의 에너지 전환을 돕는 정의로운 전환 파트너십(Just Transition Partnership) 등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의 탈탄소화에 관한 기술·재정적인 지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양측은 중국을 겨냥해 해양 분야에서의 협력도 심화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해양 진출을 가속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공조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아울러 일본은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미얀마 군사정권에 폭력 행위와 민간인 살상 중단을 촉구한 아세안의 노력을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일본의 원조는 ODA나 친환경 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3월 일본 정부는 2025년부터 QR코드 결제 통합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 아세안 국가 정부 및 중앙은행과 논의 중이며 해당 시스템의 연내 구축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어 10일 라오스에서 열린 일본과 아세안의 정상회의에서는 인적교류와 방재, 에너지와 디지털 등 폭넓은 분야에서 협력을 추진해 가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또 해양 진출과 경제적 위압을 강화하는 중국을 염두에 두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해양을 포함한 안전보장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급망의 강인화와 사이버 분야에서의 연대를 추진해 가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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