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 시공사 선정 ‘불꽃 경쟁’ 옛말, 수의계약이라도 가져오면 ‘다행’
2023년 전국 정비사업지 81%는 수의계약
조합 우위 시장에서 시공사 우위 시장으로
정부, ‘건설공사비 안정화 방안’ 마련
서울의 대표적인 ‘재건축 불패신화’로 꼽히는 강남권 정비사업 단지에서 수의계약 방식의 시공사 선정이 속출하고 있다. 치솟는 공사비와 사업성 악화로 건설사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진 탓이다. 정부는 공사비 안정을 위한 다각도의 방안을 내놓으며 시장의 회복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1조원대 초대형 재건축 단지도 ‘텅텅’
지난달 31일 정비업계 등에 따르면 재건축을 앞둔 서초구 신반포2차아파트는 현대건설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수의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해당 단지는 공사비 예산만 1조2,831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사업지로 꼽히지만, 앞서 진행된 두 차례의 시공사 입찰에서 모두 현대건설의 단독 참여로 유찰됐다. 송파구 대림가락아파트 또한 두 차례의 입찰 현장 설명회에 삼성물산 건설부문만 단독으로 참여했다. 이에 대림가락아파트 재건축 조합은 연내 삼성물산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한 후 내년 초 시공사 선정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건설사들의 무응찰로 유찰을 거듭, 시공사를 찾지 못한 사업지도 포착된다. 서초구 방배7구역 재건축 조합은 지난 4월과 6월 진행한 두 차례의 입찰이 모두 무응찰로 유찰된 후 10월 8일 시공사 선정을 위한 세 번째 입찰 공고를 냈다. 송파구 한양3차아파트 역시 지난 10월 21일까지 시공사 선정 입찰 의향서를 받았지만, 한 건의 의향서도 들어오지 않으면서 유찰됐다.
계약 후에도 끊이지 않는 공사비 갈등
대규모 정비사업을 수주하기 위한 건설사의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사비 증가와 건설경기 악화로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게 되자, 건설사들이 경쟁보다는 수의계약을 유도해 최대한 계약 내용을 유리하게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주거환경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시공사를 선정한 전국 정비사업지(재건축·재개발·리모델링) 57곳 가운데 46곳(81%)은 단독 입찰에 따른 수의 계약으로 시공사를 선정했다. 이는 전년(57%) 대비 24%p 증가한 수치다.
건설업계에서는 소위 ‘노른자’ 입지라도 경쟁 입찰 자체가 건설사의 영업비 지출을 늘려 이를 꺼릴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결국 수익성이 문제”라고 짚으며 “수주전에 뛰어들었다가 패배하면 입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데, 이는 큰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수주 경쟁을 하다 보면 마케팅 같은 비용이 들어가는 데, 이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턱없이 낮게 책정된 공사비도 건설사들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드는 요소다. 현장에 투입되는 공사비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정비사업 조합에서 제시하는 공사비로는 충분한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올 상반기 재건축 최대어로 꼽혔던 개포주공5단지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940가구인 해당 단지는 지상 최고 35층, 14개 동, 총 1,279가구로 재건축 예정이다. 조합은 3.3㎡당 840만원의 공사비를 제시하며 지난 5월 시공사 선정 입찰에 나섰다. 당시 입찰에서는 대우건설이 단독 참여하면서 자동 유찰됐다. 건설업계에서는 강남권 재건축 공사비가 900만원을 넘어 1,000만원대에 육박하고 있는 지금 터무니없이 낮은 공사비가 유찰의 원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때문에 일부 단지에서는 공사비를 증액해서라도 시공사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22차 재건축 조합은 7년 전 책정한 569만원(3.3㎡당)의 2배가 넘는 1,300만원으로 현대엔지니어링과 공사비 상향 계약을 맺었다. 3.3㎡당 1,300만원의 공사비는 강남권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다만 해당 단지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의 공사비 검증 결과 시공사 증액 요구분 중 220억원을 감액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받아 공사비 갈등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다.
국토부 “건설 공사비 상승률 연 2%로 관리”
이처럼 공사비 분쟁으로 인한 갈등이 증가하자 정부도 사업시행자와 시공자 간 갈등 해소를 위해 공사비 검증을 공사계약 체결 시에 가능토록 하는 등 제도 보완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9월 관련 내용은 담은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 일부개정고시안’을 발표, 행정예고에 돌입했다. 국토부는 해당 고시안을 통해 공사비 검증 제도의 실효성을 제고, 조합과 시공자 간의 갈등을 예방하고 원활한 정비사업 추진을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현장에서는 민간 공사 계약에 과도하게 공공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팽배하다. 정비사업은 조합과 건설사 간 민간 계약인 만큼 직접적인 조정 권한이 없어 각종 절차가 강화된다고 해서 실효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공사비 검증을 지원하는 각종 협력업체 역시 대부분 건설사와 관계된 업체가 대부분인 만큼 건설사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잇따르자 지난달 국토부와 기획재정부는 ‘건설공사비 안정화 방안’을 내놨다. 해외 시멘트 수입을 지원하고, 바다·산림 골재 공급을 늘려 지난 3년간 30%가량 급등한 건설 공사비 상승률을 2026년까지 연 2% 내외로 관리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업계를 중심으로 ‘수급 안정화 협의체’를 꾸려 시멘트를 비롯한 주요 자재에 대해 수요자, 공급자 간 자율협의를 통해 적정가격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하고, 필요시 다른 건설자재까지 협의체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치솟는 공사비에 시름하던 업계에서도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이 시장의 활기를 되찾아오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대한건설협회, 건설공제조합 등 주요 건설 단체가 속해있는 대한건설단체총연합회는 정부의 이번 발표 이후 “반복적인 수급 불안과 가격 급등 문제가 일부 해소될 전망”이라며 반겼다. 한국시멘트협회 역시 “정부가 시의적절하게 자재별 수급 안정 협의체를 구성ㆍ운영키로 결정한 것에 대해 시멘트업계는 적극 환영한다”면서 “관계 부처 및 유관 기관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협력을 통해 시멘트 수급 안정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