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데이터] 英 트러스 총리, 44일 만에 총리직 사임은 예견된 참사였나?
감세안 후폭풍, 트러스 총리 결국 44일 만에 사임 우크라이나 정세와 경기 침체, 억울한 환경이었다는 반박도 있어 역량 부족 PC인사 채용으로 인한 참사, 한국도 되돌아봐야 할 때
영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일으킨 감세안 발표로 극심한 후폭풍에 시달려 온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임명된 지 44일 만에 사임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는 감세안에 따른 경제 충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표명했다. 지난 14일에 정책 혼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임명 38일 만에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경질한 데다, 이번 주 초에는 정치적 동지였던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까지 사임 절차를 밟았다. 트러스 총리는 후임자가 결정되는 다음 주 초까지 직위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역사상 최단명 총리다.
트러스 총리는 집권하던 9월 초만 해도 영국 보수당의 상징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2020년대 버전이라는 칭호를 꿈꿨으나 경제 위기 중에 감세정책 실패로 지지층이 붕괴하면서 취임 44일 만에 사임이라는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지금까지 최단명 총리는 19세기 초반 조지 캐닝으로, 취임 119일 만에 사망한 경우였다.
아마추어 내각, 예견된 참사였다
전문가들은 PC주의 성향이 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인선이 참사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경제학 박사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세부 주제는 경제사였다. 이후 언론사에 잠깐 재직한 것 이외에 현장 경제 경험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 임명 당시 영국 여론이었다. 한 금융관계자는 영국 헤지펀드들이 재무장관을 상대로 ‘장난을 칠 것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실제로 콰텡 재무장관이 감세안을 발표한 직후 장기 국채 발행 물량이 많이 늘어나리라 예측한 헤지펀드들이 너도나도 장기채를 매도하면서 장기채 가격이 폭락했다. 물가 상승 위협에도 불구하고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국채를 대규모로 사들이는 팽창통화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10년채 금리는 3.3%대에서 4.5%까지 치솟아 1980년대 이후 최대 상승 폭을 기록한 바 있다.
철의 여인, ‘인사가 만사’라는 것을 망각했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대처 전 총리와 유사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강조해온 트러스 총리는 영국 국회인 웨스트민스터에서 발언에서도 강경한 논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어권 커뮤니티의 한 누리꾼은 사임 발표 직전일인 19일 트러스 총리가 상대 당의 공격에 반박하는 강한 어조의 국회 토론을 하는 장면과, 사임을 발표하는 20일 트러스 총리에게서는 보기 드문 낮은 톤의 조용한 발표를 비교하는 영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영국 현지 언론도 보수당의 인재 풀이 급격히 말라붙은 상태라는 점, 그런 인재 풀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트러스 총리의 용인술 부재가 눈에 띄는 45일을 보냈다는 평을 냈다. 영국 더 가디언(The Guardian) 지는 콰텡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하도록 하는 절차가 있던 지난주에 이미 다우닝가 10번지 일대에서는 함께 결정한 일의 책임을 씌우는 모습이 부적절하다는 평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특히 영란은행이 개입하던 지난 9월 말에 직접 언론에 나선 것이 아니라 콰텡 장관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트러스 총리의 책임 의식 부재에 대한 논의가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트러스 총리가 취임한 시점이 절묘하게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원자재 가격이 폭등한 점, 미국의 계속된 금리 인상으로 경기 침체가 가속화된 점 등을 감안할 때 ‘운이 나쁜’ 시점에 총리가 됐다는 변명도 흘러나온다.
한 국제정세 전문가는 “국제 정세가 안 좋았던 것은 사실이나, 사정에 맞춰 감세안을 내놔야지, 무조건 자기가 오래전부터 총리가 되면 내놓겠다고 생각했던 정책을 이런 시장에 쓰는 것은 국가수반이 할 일이 아니라 이상주의자가 할 일”이라는 논평을 내놨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정책은 전문가에게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트러스 총리 사임에 대한 논평으로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게 맞겠지만, 정책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또 한 번 깨닫게 됐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콰텡 장관이 좀 더 경륜과 실력을 갖춘 전문가였다면 감세안을 내놓던 트러스 총리를 말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콰텡 장관은 실제 경제 정책을 집행해본 적도 없고, 하나의 경제 정책이 일으키는 연쇄 효과를 학습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도 정책적 중요도가 높은 수많은 직위에 여당 관계자를 임명하는 경우가 많다. 윤석열 행정부는 ‘김일성주의자’라는 강경 보수 발언을 내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고, 이어 4선 의원 출신인 나경원 의원에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직위를 줬다. 둘 다 경기 침체기에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핵심적인 국가 역량이 동원될 수 있는 중요한 직위이지만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전직 정치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트러스 총리의 PC주의 4대 장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실제로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자리가 필요하니까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 단순한 기우가 아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