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입법조사처, “선거제도 개혁 논의는 왜 지지부진한가?”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안철수 의원의 ‘새 정치’ 실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실패 이유는 의석수에 매몰돼 국민 잊은 탓 입법처,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개방형 명부제 결합해야”
5월 31일 국회입법조사처(이하 입법처)가 ‘선거제 개편 논의, 왜 침체에 부딪혔나? : 새로운 대안 및 전략에 대한 모색’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도 선거제도 개혁 논의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 이유를 살펴보고, 이를 극복할 대안을 제언했다.
선거제도 개혁은 한국 사회에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됐다. 특히 2024년 4월 총선을 앞둔 만큼 기존 선거제도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을 고려할 때 개혁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선거제 개혁 시도는 성공보다는 실패로 점철됐고, 현재도 진전이 더딘 상황이다. 단적으로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직전에 도입됐던 ‘준연동형제’는 격렬한 정쟁과 더불어 파행,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기형적인 결과를 낳은 바 있다. 최근에도 국회는 정치권과 전문가들이 선거제도 개선방안을 논의해 여러 개편안을 의제로 제시했으나, 일각의 비판으로 인해 즉시 철회 및 수정되기도 했다.
대중의 관심이 여전히 낮은 이유
개혁이 실패로 이어진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대중의 실질적인 지지와 그에 따른 개혁 압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대중은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없는 국회의원 의석수 및 비례대표 확대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한 개혁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정치 세력은 종종 거부권 행사를 통해 대중의 반대를 악용해 개혁 과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나 의석수 확대에 대한 법안들이 제안될 당시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의 지지는 다소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례로 더불어민주당은 ‘4+1 협의체’라는 정당 연합을 구성하여 미래통합당에 대한 견제를 강화했으나, 처음부터 국민을 설득하고 정치적 압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결단과 전략이 부족했다. 반면 소수당파였던 미래통합당은 강력한 거부권 행사를 통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파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선거제 개혁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금껏 정당들은 국민의 요구와 바람을 진정으로 대변하기보다는 국회의원 의석수를 늘리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따른 위성정당 창당은 국민의 환멸을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결국 국민은 대표성 제고를 위한 진정한 노력보다는 정치적 조작으로 점철된 선거제 개혁에 실망하게 된 것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실패
민주주의 공고화 이후의 정치 개혁은 기존 지역갈등뿐만 아니라 이념·세대·계층·갈등이 중첩되면서 소모적 갈등의 정치 극복과 국민 통합 문제가 부상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전개됐다. 당시의 정치개혁은 극심한 갈등을 야기하는 현상이 ‘승자독식’이라는 왜곡된 대표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이를 해결할 방안 모색과 함께 시작됐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치권에서는 선거제도에서 비례성을 강화해 승자독식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해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안철수 의원의 ‘새 정치’ 실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선거제도 개혁 논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제 개혁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난 총선 당시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기대가 무색하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준연동형제를 추진한 정당연합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이해관계에 입각한 결속의 동기가 결여돼 있었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은 스스로가 거대양당제의 수혜자였고, 준연동형제 정당연합에의 참여도 정치 전략적 동기가 주된 것이었기 때문에 막판에 거부적 행위자로 돌아섰다. 다시 말해 준연동형제에 실질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세력은 제3, 4당 그리고 기타 세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준연동형제의 목적과 전략 자체에 내포된 한계도 문제로 지적된다. 선거제 개편 논의 과정을 길게 놓고 되돌아보면, 개혁의 방향과 핵심 내용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제19대 대통령선거 공약에서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준연동형제는 거대정당과 소수정당 간 비례성 강화를 통한 다당제 전환이라는 지향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권역별 비례대표제라는 원래의 지론과는 차이가 있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개방형 명부제 합쳐야
이에 입법처는 과거의 실패를 인식하고 선거 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주요 정당을 개혁의 대상이 아닌 이해관계자로 설정하는 제도적 설계를 제안했다. 대표적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개방형 명부제 결합이 있다. 의원정수 및 현행 방식의 비례대표 증원에 대한 강한 거부 현상을 현실적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권역단위 비례대표제와 개방형 명부제의 조합은 정치권의 거부권 행사에 직면할 가능성을 회피하면서도 선거제의 비례성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지역 대표성의 성격을 상당 부분 갖고 있는 만큼 지역 대표성에 대한 유권자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할 수 있어 현행 비례대표제에 대한 여론의 반감을 완화할 수 있다. 여기에 개방형 명부제를 도입할 경우 유권자가 비례대표의원을 직접 선출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더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이는 승자독식과 정치적 양극화를 낳는 소선거구 지역구를 적정수준으로 조정할 수 있는 여론 기반을 좀 더 잘 다질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지역구와 권역의 비례대표 의석수를 대폭 조정함으로써 비례성을 강화할 수 있는 만큼 소지역주의에 갇히지 않고 미래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을 위한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투명성과 직접성이 높아질 경우 승자독식 시나리오는 물론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게리맨더링(정치적 이득을 위해 선거구 경계를 조작하는 행위)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래를 향한 걸음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개방형 명부제의 결합은 단순한 전략적 변화가 아니라 진화하는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다. 미국 상원의원의 역할과 같이 소지역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적 의제를 다룰 수 있는 정치인을 양성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또한 소선거구제나 도농복합형 선거구제 등 다양한 형태의 지역구제가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는 제도적 체계, 일관성, 시대적 요구와의 부합성, 여론, 정치 집단 간의 역학관계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결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제 개혁은 선거 과정의 초점을 국민 중심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흔히 특권 집단으로 여겨지는 국회의원이 대중과 다시 연결돼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선거 과정은 당파적 이해관계가 아닌 대표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결론적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개방형 명부제를 결합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한국의 선거제도를 강화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비례성과 투명성, 그리고 국민의 요구에 초점을 맞춘 개혁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데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입법처는 “선거제 개편의 목적과 방향을 명확히 하여 목표와 전략 간에 내적 모순과 충돌에 빠지지 않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