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당 발목잡기” 오명 무제한토론, 제도 개선보다 중요한 건?

입법처 ‘무제한토론제도 둘러싼 쟁점과 과제’ 보고서 발간 무제한토론 일상화 英 의회, ‘설득의 기술’ 중요 사회적 문제 ‘함께 해결’ 위해 토론 분위기 조성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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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당의 ‘비장의 카드’라 불리는 무제한토론제도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위해 도입된 무제한토론제도가 소수당이 다수당을 설득하는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변질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도 개선과 더불어 국회 체질 개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에 국회입법조사처(이하 입법처)는 14일 ‘국회 무제한토론제도를 둘러싼 쟁점과 과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하고 무제한토론제도의 효과적 운영을 위해 ▲대상 안건 ▲종결 방식 ▲찬성토론 허용 ▲의제 관련성 등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대상·허용 발언 범위 불분명, 구체화해야”

입법처는 가장 먼저 무제한토론 대상 안건에 주목했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는 안건이 결의안, 승인안 등 의안을 비롯해 청원 및 동의(動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큼 토론 대상 안건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 국회 관행과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 등을 반영해 토론 대상 안건과 배제 안건을 국회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종결 방식에 대해서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및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만 있으면 종결이 가능한 ‘회기 결정’이 소수자의 토론 참여를 저해한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해결책으로는 무제한토론 신청 이후부터 종결 전까지 회기를 결정할 때는 예외적으로 ‘가중 과반'(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는 방안을 적용할 것을 제시했다.

찬성토론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부결이 예상되는 안건에 대해 소수파의 찬성토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과거 무제한토론에서 찬성토론을 허용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나아가 국회법 제106조 제2항에 명시된 찬성자와 반대자 간 교대 발언 원칙 등을 들어 해당 원칙은 무제한토론제도에 적용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무제한토론에서 발언 원칙의 예외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민주주의 구현 외쳤지만, 현실은 “상대파 발목잡기에 불과”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전략인 필리버스터(filibuster) 수단 중 하나인 무제한토론은 소수파가 다수파를 설득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 구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도입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무제한토론은 프리부터(freebooter)라 불리는 영국 의회의 활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 국회는 2012년 5월 무제한토론제도 도입 후 지금까지 총 8건의 법률안에 대해 무제한토론을 실시한 바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무제한토론은 소수당의 효과적인 견제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무용론’부터 각종 민생법안 처리를 더디게 만드는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등 원래의 도입 취지를 흐리고 있다는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실제로 2019년 12월 당시 야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은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해당 두 안건 외에도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의 안건 전부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그 결과 약 170개의 민생법안 처리가 지연되며 “필리버스터가 반대파의 찬성파 발목잡기로 악용되고 있다”는 부정적 여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일 년 내내 ‘토론의 장’ 영국 의회 vs 토론 대신 ‘고성’ 가득 한국 의회

이처럼 무제한토론제도가 국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로는 대표적으로 ‘자유로운 토론 문화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무제한토론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지는 국가로 꼽히는 영국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당시 영국 의원들은 대합실을 연상시키는 긴 의자에 빽빽이 앉아 끝나지 않는 토론을 펼쳤다. 의회장 안에서 음주와 흡연이 가능했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조금이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발언이 제기되면 야유와 놀림, 폭소를 쏟아낼 수 있을 정도의 이성도 함께 존재했다. 비록 1990년대 후반부터 질의응답이 TV 생중계되며 격식이 더해지긴 했지만, 영국 의회는 여전히 일 년 내내 뜨거운 토론 열기로 가득하다. 의원들의 능력이 설득의 기술, 즉 토론의 기술로 가늠되는 셈이다.

반면 우리 국회는 어떨까. 지난 2010년 미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의 4대강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국회 몸싸움 장면을 포착해 ‘올해의 사진’으로 꼽은 바 있다. 이후 2012년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국회 문화’를 뿌리 뽑고자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됐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우리 국회의 모습은 합리적인 토론 대신 상대방을 향한 각종 비방과 막말로 얼룩져 있다. 무제한토론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최근 진행된 무제한토론은 지난해 4월 형사소송법 개정안 처리에 맞서 국민의힘 측이 신청한 것으로, 4월 30일 오후에 시작된 무제한토론은 약 7시간 동안 쏟아진 고성과 삿대질, 야유 속에 종료됐다.

합리적 토론 가능한 국회로 체질 개선 ‘필수’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도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다수의 의견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사회에는 함께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문제들이 무수히 많다. 바로 이 순간 필요한 것이 토론이다. 물론 토론을 거친 후에도 이상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갈등 상황을 조금이나마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제한토론제도의 당초 도입 목적인 ‘참된 민주주의 구현’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관련 규정 하나하나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건전하고 합리적인 토론이 원활하게 펼쳐지는 국회로 체질 개선이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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