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중국] 美 규제에도 반도체 굴기 이어가는 中, 과감히 ‘최첨단 반도체’ 포기?
첨단 반도체 접근 불가능해진 중국, 성숙공정 반도체 활용한 ‘탈출구 찾기’ 최첨단 넘어선 ‘차세대 시장’에 주목, 미래 관건은 3세대 반도체? 갈륨 무기화·반도체 설비 투자 규모 감소, 우리나라 시장엔 악재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를 무릅쓰고 ‘반도체 굴기’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규제하에 놓인 최첨단 반도체 분야를 뒤로 하고 성숙공정을 활용한 칩렛 기술, 차세대 반도체 시장 선점 등에 힘을 쏟는 양상이다. 중국의 반도체 전략에 대대적인 변화가 발생한 만큼, 대중국·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역시 불가피한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인다.
‘첨단 반도체 기술’ 접근 불가능, 위기에 빠진 中
올해 상반기 중국의 반도체 및 반도체 제조 장비 수입은 각각 22.4%, 23% 감소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 영향이 본격화하자 첨단 반도체 시장 접근에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은 특히 주요 반도체 제조국에서 눈에 띄게 줄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집계된 중국의 반도체 수입 감소분 중 대만이 차지한 비중은 40%, 한국이 차지한 비중은 30% 이상이다.
중국 기업들은 당장 수급이 어려워진 반도체와 장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일례로 중국의 AI 서버 생산 업체인 인스퍼(Inspur)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AI 서버 제작·실험실 및 기업용 첨단 AI 개발 장비에 활용되는 반도체 공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인스퍼는 반도체 수급 악화로 인해 상반기 수익이 30% 감소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7년 “오는 2030년까지 AI 연관 산업을 10조 위안(약 1,821조원) 규모 시장으로 키워 미국을 넘어서는 글로벌 AI 리더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반도체 산업을 국가 전략화했으며, 꾸준히 핵심 반도체 기술과 장비에 대한 국산화를 추진해 왔다. 최근 미국의 규제로 인해 중국 반도체 시장이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을 입자, 중국은 중국만의 ‘탈출구’를 찾아 발버둥 치는 양상이다.
첨단 대신 성숙공정 택했다, DUV 장비 수입 증가
중국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노광장비의 국산화 수준이 높지 않으며, 대부분의 장비 조달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대중국 규제 이후 중국의 절대적인 노광장비 수입 규모가 감소한 가운데, 특정 품목에 한해 눈에 띄는 수입 증가세가 관찰됐다. 바로 심자외선(DUV) 장비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세계 1위 반도체장비 기업 ASML의 중국 매출 비중은 올해 1분기 8%에서 올해 2분기 24%까지 급증했다. ASML의 올해 2분기 매출이 69억200만 유로(약 9조9,000억원)임을 감안하면 중국에서만 약 16억6,000만 유로(약 2조4,000억원)의 매출이 발생한 셈이다.
미국의 장비 수출 통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ASML 장비 수입이 증가한 것은 DUV 노광장비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첨단 반도체 제작에 활용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경우 미국의 규제로 수출이 차단됐지만, DUV 장비는 아직 중국 내 반입이 가능한 상태다.
중국이 DUV 장비를 적극적으로 사들이는 이유는 첨단 반도체의 하위 단계인 ‘성숙공정’ 반도체 생산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중국이 칩렛(chiplet, 여러 반도체 칩을 하나의 칩으로 결합하는 기술)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읽힌다. 칩렛 기술을 활용하면 성숙공정에 해당하는 28nm(나노미터) 공정 반도체로도 7nm 첨단 공정 반도체의 성능을 낼 수 있다.
미국의 강력한 규제 압박을 받는 현재, 성숙공정 반도체와 칩렛 기술은 중국이 최첨단 반도체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묘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의 칩렛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평이 나온다. 올해 초 중국 내 반도체 후공정 1위 기업인 JCET는 4nm 칩렛 공정에서 양산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중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기업인 화웨이 역시 지난해 900건 이상의 칩렛 관련 특허를 출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세대 반도체’ 시장 선점에 방점
경쟁력이 부족한 첨단 반도체 시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중국은 2017년 시행된 13차 5개년 규획, 2021년 14차 5개년 규획에 연이어 ‘3세대 반도체 소자 개발 및 양산’을 명시한 바 있다. 3세대 반도체란 중국에서 흔히 ‘전력반도체’를 칭하는 말로, 기존 실리콘 반도체보다 전력 처리 능력 및 열전도율이 높은 질화갈륨(GaN)과 실리콘 카바이드(SiC) 반도체 등이 포함된다.
현지 시장조사업체에 따르면 중국 내 3세대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23년 152억 위안(약 2조7,679억원)에서 2028년 583억 위안(약 10조6,164억원)으로 연평균 30%가량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차후 시장을 이끌어갈 주요 기업으로는 삼안광전, 이노사이언 등이 꼽힌다. 특히 삼안광전은 지난달 유럽 주요 전력반도체 기업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의 협력, 중국 현지에 대규모 SiC 웨이퍼 제조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 투자 규모는 4조원에 이른다.
중국의 ‘작전 변경’,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 미칠까
중국의 대대적인 반도체 전략 변화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중국은 3세대 반도체 경쟁력 확보를 위해 이달부터 갈륨과 게르마늄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수출이 제한된 두 소재는 반도체, 통신, 태양광 등 산업 전반에서 활용되는 물질로, 중국이 글로벌 시장 공급망의 80~90%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갈륨은 3세대 반도체인 GaN 반도체의 핵심 원료이기도 하다.
업계에서는 이번 중국의 수출 규제가 당장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중국이 갈륨을 무기화하면서 차세대 반도체 시장 선점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차후 중국이 현지의 유리한 공급망을 활용해 자국 기업의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빠르게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중국이 갈륨 공급망을 독점해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경우 국내 기업을 비롯한 중국 외 GaN 웨이퍼 개발 업체들이 유의미한 타격을 입게 된다.
미국의 규제 영향으로 중국의 반도체 설비 투자 규모가 급감한 만큼,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납품하는 한국 기업들도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 상반기까지 중국 매출 비중이 급증했던 일부 기업은 수출 감소의 ‘직격탄’을 맞게 될 위험이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 설비투자 규모는 지난해 350억 달러(44조6,250억원)에서 올해 130억 달러(16조5,750억원) 수준으로 65% 이상 급감할 전망이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 감소 및 ‘자력갱생’ 시도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 회복이 한층 더뎌질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 수출로가 한 번에 좁아질 경우 시장에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이 될 것이라는 우려다. 아울러 중국의 더딘 성장률 회복, 대중국 관계 경색 역시 우리나라 경제 반등의 ‘족쇄’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