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호무역주의에 유탄 맞은 韓, ‘외교력 부족’에 업계 불안감 ‘고조’
中 억제하려던 프랑스, 졸지에 韓까지 ‘폭격’ 美 IRA 사태 못 막은 韓 정부, 외교력 부족 또 가시화되나 퍼져가는 보호무역주의, 정부 협상 통해 기업 부담 줄여야
프랑스에서 탄소 배출량 감축이란 명분을 내세워 사실상 자국 전기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프랑스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도입을 예고하고 나섰다. 이에 한국 전기차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이와 관련해 한국무역협회(무협) 측은 “프랑스판 IRA 도입은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소지가 있다”며 강한 우려를 전달했으나, 프랑스의 입장이 강경해 업계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프랑스판 IRA 등장, ‘또’ 새우 등 터지는 韓 전기차 업계
29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무역협회 브뤼셀 지부와 유럽 한국기업연합회(KBA)는 지난 25일자로 프랑스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지급 조건 관련 시행령 개편안 초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무협과 유럽 KBA는 의견서에서 “한·EU FTA는 양 당사국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 차별 없이 동등한 대우를 의무화하고 있음에도 이 초안에 따르면 한국산 전기차가 프랑스 및 다른 EU 국가에서 생산된 전기차보다 차별을 받을 수 있다”며 “최종 시행령에서는 한국산 제품에 대한 차별적 조치를 배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프랑스 정부는 지난 7월 말 전기차 보조금 지급 조건에 관한 시행령 개편안 초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는 앞으로 해상 운송을 포함해 전기차 생산 전 공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환경 점수’를 매긴다. 지금은 전기차 가격과 에너지 효율 등에 따라 보조금을 결정하는데, 앞으로는 밸류체인의 탄소발자국까지 따지겠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는 유럽 내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고 있는 중국산 전기차의 확산세를 막기 위한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이 프랑스 정부 보조금을 싹쓸이하는 상황을 막으려는 대비책인 셈인데, 문제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우리나라까지 그 유탄을 맞게 됐다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처럼 유럽에서 거리가 멀고 운송비와 연료가 많이 드는 나라일수록 보조금 지급 판단 시 현격히 불리하다. 이에 무협은 “해상운송 탄소배출계수의 경우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데이터에 견줘 10배 이상 높게 책정됐다”며 “원거리 생산 기업을 대상으로 한 차별적인 해상운송 탄소배출계수 (조항) 삭제를 요청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해당 조항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을 경우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탄소배출계수를 적용하거나 다수 국가 기업으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해 더 정확한 평가를 토대로 계산해야 한다”며 “환경점수 합산 시 30%가량 반영될 예정인 재활용·바이오소스 자재 활용 등과 관련한 평가 방식도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역설했다.
보호무역주의, 유럽까지 확산되나
최근 경기 불황이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는 모양새다. 미국과 중국에 이어 프랑스까지 보호무역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시사하면서 유럽 전역에 이 같은 추세가 확산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지난 5월 “미중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여러 정부가 무역 관계를 무기화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개방된 경제와 WTO에 부담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면서 전통적인 무역 구조가 붕괴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 사이에선 우리나라 또한 전통적인 무역 전략에서 벗어나 맞춤형 전략을 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옛날엔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어서 물건만 좋으면 다 팔렸다. 수출주도형 경제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이젠 미·중을 시작으로 이제 마켓이 쪼개지기 시작했고 보호무역주의에 이어 정치·안보 논리까지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구에서 그간 상대하지 않았던 시장을 상대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게 대한민국의 운명”이라고 덧붙였다.
韓 산업 저해의 근본 문제는 ‘외교력’?
보호무역주의 시대 확산을 우리나라가 무력하게 관망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미국이 IRA 도입을 시사하자 우리나라는 수차례 미국과 협상을 이어간 바 있다. 다만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진 못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나라는 전기차 조립 등 완성차 부문에선 완패했고, 일부 배터리 광물과 부품에 관해 다소의 양보를 얻어냈다. 즉 큰 것을 잃어버리고 작은 것을 얻어낸 셈이다.
사실 전기차 조립 부문에선 현대·기아가 내밀 카드가 애초부터 없었다. 미국 내에서 완성차를 조립해야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현지 공장을 두고 있지 않은 현대·기아차로선 딱히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업계 사이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외교력 부족이 가시화된 사건”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이번 프랑스판 IRA 사태에도 정부가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외교 능력을 십분 발휘해 미국 IRA 사태를 뛰어넘은 일본과의 비교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미국 IRA 사태 당시 잽싸게 미 당국과 심도 깊은 협상을 이어간 끝에 미국과 핵심광물협정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보조금 3,750달러(약 496만원) 혜택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한 바 있다. 지난 3월엔 별도로 미국과 핵심광물협정을 맺으면서 IRA법에서 규정하는 FTA 체결국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프랑스판 IRA 사태로 국내 전기차 업계는 다시금 위기 상황에 몰렸다. 특히 최근엔 일본과 독일의 충전 시장에도 보호무역주의가 횡행해 업계의 어려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시금 되찾기 위해선 정부의 외교 싸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은 보호무역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자유무역만 외치다 새우 등 터지는 모양새”라며 “국내 시장도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 업체를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산업과 통상 정책 간의 연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만큼, 정부가 협상을 통해 기업의 부담을 외교적으로 덜어 줄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