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로 ‘핵 가방’ 노출하고 ‘핵실험금지조약’도 없던 일로, 러시아의 파격 행보
푸틴, 핵무기 발사할 수 있는 버튼과 핵 공격 암호 탑재된 핵 가방 보란듯 노출 핵실험 금지 조약인 CTBT 비준까지 철회, 핵실험 재개 가능성↑ 소형 전술핵탄두 '화산-31형'과 '핵 방아쇠' 공개한 북한, 한반도 긴장 고조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과 서방의 관심이 중동에 쏠린 사이 의도적으로 핵 가방을 노출하는 등 국제사회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과감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 하원이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철회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면서 러시아의 핵실험 재개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한편 최근 소형 핵탄두에 이어 핵 방아쇠까지 공개한 북한의 행보에 한반도의 안보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러시아 해군 장교가 핵 가방 ‘체게트’ 들고 가는 모습 포착
18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회의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 후 다른 회담장으로 걸어가고, 그 뒤를 군복 차림의 해군 장교 2명이 검정색 핵 가방을 들고 가는 모습이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의 핵 가방은 해군 장교가 들고 가는 것이 전통이다. ‘체게트(Cheget·코카서스 산맥 체게트산의 이름에서 유래)’라 불리는 이 가방은 대통령이 여행할 때 반드시 가지고 다니지만 카메라에 찍히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핵 가방은 본질적으로 대통령과 군 고위부를 연결하는 보안 통신 수단으로, 극비의 전자지휘명령 네트워크인 카즈베크(Kazbek)를 통해 전략로켓부대에 명령을 하달한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도 핵 가방을 갖고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발레리 게라시모프 현 총참모장 역시 핵 가방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핵 가방에는 핵무기가 탑재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버튼과 핵 공격 암호가 들어있다. 러시아 즈베즈다TV가 2019년에 방영한 영상에 따르면 핵 가방에 여러 개의 버튼이 있으며 이 가운데 지휘 버튼은 백색의 발사 버튼과 적색의 취소 버튼 두 개로 구성돼 있다. 미국 대통령도 핵 가방이 있는데 공식 명칭보다는 ‘풋볼’ 또는 ‘핵 풋볼’이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핵 풋볼은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 있을 때 핵미사일 발사 명령을 내릴 시 사용하는 암호를 간직하고 있다.
서방 향한 강력한 메시지 전달 차원
푸틴의 이번 행보를 두고 외교 전문가들은 일부러 핵 가방을 노출시켜 우크라이나와 전 세계에 핵 사용이 가능하다는 위협을 또 한 번 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우 전쟁으로 약 20개월간 고립무원 위기에 있던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 서방의 관심이 중동에 쏠린 사이 본격적인 대외 행보에 나섰다는 것이다.
특히 같은 날 러시아 하원(국가 두마·State Duma)이 CTBT 비준을 철회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러시아의 핵실험 재개 등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가 두마는 CTBT 비준 철회 법안을 2·3차 독회(심의)에서 반대 없이 찬성 415표로 통과시켰다. 법안이 상원 심의를 통과하면 푸틴 대통령 서명을 거쳐 발효된다.
국가 두마의 이번 법안 통과는 이달 초 푸틴 대통령의 압박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푸틴 대통령은 지난 5일 미국이 1996년 유엔총회에서 승인된 CTBT 비준을 철회해야 한다고 못 박은 바 있다. CTBT는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으로, 러시아는 1996년 이 조약에 서명하고 2000년 비준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1996년 조약에 서명만 하고 비준은 하지 않은 미국과 똑같이 행동하겠다며 CTBT 철회를 줄곧 주장해 왔다.
러시아가 CTBT를 없던 일로 만들면서 서방 국가를 상대로 한 푸틴 대통령의 핵 위협도 강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막는 방법으로 핵실험 재개 카드를 꺼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핵을 통해 서방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주겠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마친 뒤 핵 가방을 든 해군 장교들을 노골적으로 노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16일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대통령,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등과 연쇄 통화를 하는가 하면,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주민들을 위한 27톤의 구호물자를 보내기도 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푸틴이 중동 분쟁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것이라 분석했다. 러시아는 현재까지 최소한 표면적으론 민간인 피해를 우려하며 양측의 휴전을 촉구하고 있으나, 종국에는 ‘중동 문제의 중재자는 러시아’라는 취지로 홍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북한도 ‘핵 방아쇠’ 보유, 대한민국 안보 ‘적신호’
러시아가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 안보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북한도 ‘핵 방아쇠’라 불리는 핵무기종합관리체계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8일 소형 전술핵탄두인 ‘화산-31형’과 함께 처음 공개한 핵 방아쇠는 북한 핵무기의 실전성이 제 궤도에 올랐다는 점을 시사한다. 핵무기의 기술적 타격 능력을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 최고 지도자의 핵 공격 결심을 신속,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체계를 정립하고 있다는 뜻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 같은 체계 구축에 대해 “그 언제든, 그 어디에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완벽하게 준비돼야 영원히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라며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하고 우세한 핵 무력이 공세적인 태세”를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9월에는 핵무력정책법을 제정하고 스스로를 ‘책임 있는 핵보유국’이라 선언하기도 했다. 핵무기 관련 국제법인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르면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만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북한은 인정받지 않은 ‘셀프 핵보유국’이지만, 지속적으로 핵 능력을 강화하면서 핵보유국 굳히기를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괴물 ICBM’이라 불리는 화성-17형 발사에 이어 탄도미사일뿐만 아니라 전략순항미사일도 꾸준히 개발하고 있으며 올해 3월에는 새로운 전술핵무기 실험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저수지에서의 미사일 발사 훈련 및 수중에서 폭발해 해일을 일으키는 핵어뢰 실험도 공개했다. 아울러 500m, 800m 상공에서 공중 핵폭발 실험도 실시했으며 군사위성 발사도 임박해 있는 상황이다. 파키스탄·인도·이스라엘과 같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밖에서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겠다는 심산이다.
아직은 ‘짝퉁’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지만, 확실한 것은 북한의 핵 체계가 다른 어떤 핵보유국보다도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가 북한의 핵무력정책법에 대해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정치군사적 상황에서 핵무기의 선제적, 적극적, 임의적 사용을 규정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더욱이 북한이 화산-31을 통해 전략핵잠수함 소형 핵탄두 운용 가능성까지 높아진 만큼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자체적인 핵추진잠수함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구상에 핵무기가 전멸할 때까지 가장 강력한 핵무기를 갖겠다는 북한의 이 섬뜩한 역설은 한미일 군사협력과 맞물리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