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국제 정세와 ‘가라앉는’ 韓, “경제 ‘도미노’에 속절없이 무너질라”
경제 '둔화' 평가 내린 기재부, 한은도 "韓 경제 침체돼" '한강의 기적' 이어왔지만, "2023 위기는 뿌리부터 달라" 위태로운 국제 정세, "위기 상황 이미 '코앞'"
한국은행이 우리나라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나섰다. 기획재정부가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둔화’ 평가를 내린 지 반년만이다. 우리나라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5년 만에 소비·투자·수출이 동시에 감소하는 ‘트리플 위기’ 상황에 몰렸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각종 원인이 분석되는 가운데 ‘정부 지출 감소’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지나치게 긴축만 강조하다 민간 시장의 풀이 줄어버렸단 지적이다.
눈부신 성장 일군 韓, 올해는?
1997년 외환위기 극복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은 가히 눈부셨다 할 만하다. 경제지표만 보면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국내총생산(GDP)은 1998년 3,800억 달러(약 498조원)에서 2020년 1조6,000억 달러(약 2,096조원)를 돌파했다. 무려 330% 급증한 것으로, 같은 기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GDP 평균 증가율이 104%에 불과함을 고려하면 독보적인 수치다.
양적 성장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질적 성장은 더욱 괄목할 만하다. 2000년 우리나라 GDP 대비 연구개발(R&D) 지출 비율은 OECD 평균 미달이었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R&D 지출 비율은 미국과 대만을 큰 차이로 따돌리고 이스라엘과 투톱 체제를 확고히 했다. 2020년엔 사회복지 지출액도 GDP 대비 4.4%의 압도적 꼴찌에서 12%까지 증가했다.
이 같은 성장의 동력은 안정화된 재정이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6년 국가재정법이 제정되면서 재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시기부터 우리나라의 재정은 자원배분의 효율성, 형평성, 경기 조정 등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시작했다. 실제 1998년 우리나라 정부 전체 지출액은 100조원에 불과했으나, 2020년엔 660조원이 훌쩍 넘는다. 이는 GDP 증가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산업화, 1980년 민주화에 성공했고 2020년도 이후엔 국가 재정의 기틀을 탄탄히 마련해 냈다. 우리나라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지난 2018년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 등을 거치면서도 ‘한강의 기적’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IMF가 지난달 예측한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1.4%에 불과했다.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일본 성장률 2%보다 뒤처진 것이다. 특히 IMF의 선진국 평균 경제 성장률 1.5%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국내 여론의 충격은 더욱 컸다. 원인은 내수에 있었다. 올해 수출은 3분기(누적 기준)까지 7.2% 증가하는 등 나쁘지 않은 수준을 보여줬으나, 투자(총고정자본형성)는 -0.38%로 오히려 역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소비(최종소비지출)는 불과 0.16% 증가하는 데 그쳤다. 소비와 투자에서 발생한 내수 위기가 국내 경제를 완전히 헝클어 놓은 것이다.
경제위기 코앞으로, ‘정부 책임론’ 솔솔
이에 일각에선 정부 책임론이 솔솔 새어 나온다. 언론에선 올해 발생한 갑작스러운 경제 동결 사태를 언론들은 ‘정부 재정 위기’라 명명하며 비판적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실제 정부의 책임이 묻어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나라살림연구소가 지난달 18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8년 트리플 위기 당시 우리 정부는 민간소비(-3.8%)와 민간투자(-4.9%) 감소를 정부소비(2.8%)와 정부지출(1.6%) 증대로 대응했다. 반면 올해 2분기 트리플 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민간소비(-0.1%)와 민간투자(0.1%)에 감소세가 보였음에도 정부소비(-2.1%), 정부투자(-1.3%) 감소에 몰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구체적으로 올해 2분기의 전반적인 소비는 -0.7%, 투자는 -0.1%, 수출은 -0.9% 등 감소세를 보였는데, 이처럼 3개 부문이 모두 감소한 건 2008년 4분기 이후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상 가계 살림은 수입이 줄면 지출도 줄어들지만 국가 재정은 내수가 안 좋아 세수입이 줄면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라며 “경기 조절을 위해 경기에 역방향으로 운영하는 게 국가 재정의 원칙이라는 의미인데, 정부는 돈을 풀지 않고 빗장을 걸어 잠금으로써 경기 악순환에 일조했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론 정부의 긴축 재정을 무조건 비판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무작정 빗장을 풀기만 해선 불안정 재정이 금융위기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무작정 손을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정부는 최근 우윳값이 뛰어오르는 밀크플레이션 낌새가 지속되자 우유와 커피, 빵, 아이스크림 등 7개 품목 가격을 전담 관리하겠단 방침을 발표하고, 주요 가공식품 물가를 관리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시장 동향을 수시로 점검하도록 하는 등 물가 관리에 힘을 쏟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정부의 지나친 긴축 재정이 국가 재정 건전성에 오히려 타격을 줬다는 여론이 팽배해져 있는 만큼 당분간 정부는 책임론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사례 살피고 정책에 신중 기해야”
전문가들은 이런 때일수록 해외 사례를 살피고 정부 차원의 보다 퀄리티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장 참고할 만한 사례로는 2010년경의 스페인을 꼽았다. 당초 2008년 이전의 스페인은 비교적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2008년 미국발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함께 국제 금융시장이 얼어붙고 스페인 주택 가격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급격한 재정위기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이로 인해 스페인 내 은행들은 차례차례 부실의 늪에 빠졌고, 급기야는 차입이 막혀 파산 위기 상태에 놓였다. 결국 스페인은 유럽 금융위기 5개국(PIIGS)의 하나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사례는 가계부채가 터지면 이는 곧 은행 부실로, 나아가 국가재정위기로 전이됨을 보여준다. 현재 국내 은행들은 전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가계대출비율은 GDP 대비 105%로, 영국, 미국, 일본을 초과하며 세계 최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들께서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이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쉰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금리는 앞으로도 더욱 오를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데다, 중국의 부동산 시장도 위태롭다. 유로존 재정에 대해선 아직 낙관론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유로존 재정 취약성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와 국제금융센터 등은 “경기 침체 우려에 대응하기 위해 이탈리아 등 유로존 국가들의 정부 지출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며 “국가부채에 대한 높은 이자로 유럽 국가들의 부담이 증가하게 되면 재정적자 폭이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는 곧 여타 국가들의 재정 상황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방증이며, 또 한 국가의 위기가 도미도처럼 우리나라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반증이다.
경제위기 속 민간 시장은 이미 익사 직전까지 몰린 상태다. 외부 상황도 썩 좋지 않다. 월가에서 ‘채권왕’으로 꼽히는 제프리 건들락 더블라인캐피털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은 역대급 재정적자에 따라 적잖은 국채 이자비용 문제를 떠안고 있다”며 “이는 금융위기를 유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채금리 급락 전망도 새어 나왔다. 이에 우리 정부는 재정 상황 개선을 위해 부랴부랴 “나라 살림을 지키기 위해 지방정부에 교부하는 교부세를 감액할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당장 교부세가 줄어들면 지방정부 입장에선 원활한 재정 집행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2025년도에 반영해야 할 교부세 감액을 2023년도에 반영하면 위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위기 상황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남은 건 정부의 ‘선택’이다. 정부의 보다 신중한 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