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 가해자 처벌·피해자 보호 ‘제자리걸음’, “영국 사례 참고해 인식부터 개선해야”
英 "여성·소녀에 대한 폭력은 테러와 맞먹는 국가 위협" 영국 전역 5,000여 약국에서 ‘Ask for ANI’ 캠페인 진행 경제적 학대도 가정폭력 간주, 범위 확대로 피해자 보호 만전
지난해 5월 부산에서 발생한 ‘돌려차기 사건’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우리 사회가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미비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터무니없이 낮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 여성폭력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회도서관은 9일 발간한 ‘영국의 여성폭력 대책: 문제 인식부터 피해자 지원까지’란 제목의 외국 현안 보고서를 통해 영국에서는 여성폭력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1년 내 성폭력 피해 경험 있다” 영국 3.3%, 한국 3.5%
지난 2021년 3월 사우스런던에서 발생한 사라 에버라드 피살 사건은 영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트린 바 있다. 당시 33세이던 에버라드는 지인을 만나고 귀가하다 실종된 후 열흘 만에 숲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당시 런던경찰국 소속 웨인 쿠젠으로, 에버라드가 피살 전 강간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해당 사건은 영국 시민들이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고, 영국 정부는 즉각 대응책 마련에 돌입했다.
2022년 9월 영국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거주하는 16세 이상 여성 가운데 6.9%가 최근 1년 내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스토킹 피해를 입은 여성(4.9%)과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3.3%)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는 2019년 기준 최근 1년 사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의 비율이 3.5%로 집계(여성가족부 조사)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다.
영국 내무부는 전략적 치안 요건 재검토를 거쳐 올해 ‘여성과 소녀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and girls)’을 ‘국가 위협’으로 지정했다. 영국은 1996년 제정된 「경찰법」을 통해 국민의 생명과 자유,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위협을 국가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성폭력을 테러, 심각한 조직범죄, 국가 사이버 공격 등과 동일한 수준의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다. 국가 위협으로 규정된 여성 폭력에는 여성과 소녀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물리적 폭력 또는 학대 행위는 물론 강간 및 기타 성범죄, 가정폭력, 스토킹, 온라인에서 자행되는 범죄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피해자 보호만큼 범죄 예방도 중요
영국은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하기 전 이를 막으려는 근절전략과 전국적 캠페인도 병행하고 있다. 2021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여성폭력 근절전략(Strategy to Tackle Violence Against Women and Girls)’이 대표적 예다. 해당 전략은 피해자 지원,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 강화, 사회 전반적 시스템 강화, 예방전략 네 분야의 현황과 추진 계획을 담고 있다.
영국 정부는 피해자 지원을 위해 보복성 음란물 상담 전화를 비롯한 전문 서비스에 150만 파운드(약 24억원)를 투자했고,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 강화를 위해서는 경찰의 성범죄자 관리현황을 검토해 대응책을 수립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또 사회 전반적 시스템 강화를 위해 경찰 내 여성폭력 문제를 전담할 담당자를 임명하고, 기업 등이 채용 시 여성폭력 가해자를 가려낼 수 있도록 범죄경력 조회 제도도 정비했다. 아울러 여성폭력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한 전국적 캠페인을 위해 300만 파운드(약 48억원)의 투자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정부 주도 캠페인은 여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Ask for ANI’ 캠페인과 시민들의 인식 제고를 위한 ‘ENOUGH’ 캠페인 두 가지로 전개됐다. 먼저 Ask for ANI는 피해자가 약국 등에 들어와 “ANI”라는 사인을 보내면 직원은 피해자를 매장 내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경찰, 피해자 지원단체, 지인 등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영국 내무부는 해당 캠패인 도입 후 1년 동안 100명 이상의 피해자에게 긴급 지원을 제공했다고 밝히며 실제 지원받은 피해자의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영국 내 5,000곳 이상이 Ask for ANI 캠페인에 함께하고 있다.
ENOUGH 캠페인은 시민들의 인식 개선을 통한 범죄 예방에 중점을 뒀다.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학대에 해당하는 행동, 피해 상황별 행동 요령, 가까운 피해자 지원 단체, 피해 신고 방법 등을 상세히 안내하고 학교나 회사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홍보 포스터 등을 무료 배포했다. 이와 함께 주민들이 익명으로 우범 지역을 신고할 수 있는 파일럿 도구인 ‘스트리트세이프’를 출시해 1년간 약 12,000건의 신고 데이터를 축적하기도 했다. 영국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인원 보강 및 순찰 강화 등에 나설 방침이다.
가정폭력 범위부터 재정의
영국의 가정폭력 관련 규정은 신체적 폭력을 넘어 경제적 학대까지 가정폭력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각국 법조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1년 4월 시행된 영국의 「가정폭력법(Domestic Abuse Act)」은 가정폭력의 정의에 신체적 폭력을 넘어 정서적·강압적·통제적 행동과 경제적 학대를 포함했고, 나아가 부부 사이 별거 후에 이뤄진 학대도 통제 또는 강압적 행동으로 정의했다.
동시에 「피해자와 재소자 법안(Victims and Prisoners Bill)」을 통해 형사사법기관의 피해자에 대한 지원 강화를 도모했다. 현재 하원 보고 단계에 있는 해당 법안은 △범죄 피해자의 권리 강화 및 처우 개선 △주요 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을 돕는 공익옹호관(public advocate) 임명 △가석방 위원회 논의 시 대중의 안전을 최우선 기준으로 가석방 결정 등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가정폭력 및 성폭력 경험 실태 조사에서 볼 수 있듯 영국 내 여성폭력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으로 빈번히 발생 중이다. 또 에버라드 피살 사건 당시 수많은 영국인이 거리로 나서 ‘여성의 안전할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만큼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법적 지원과 전문가의 도움이 부족하다는 인식 역시 널리 퍼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국은 여성폭력을 테러에 준하는 국가 위협으로 규정하는 등 중대한 사회문제로 인식을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우 국회도서관장은 “영국은 여성폭력을 국가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대국민 캠페인에서부터 법률 정비에 이르는 전방위적 근절 노력을 펼치고 있다”고 강조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여성폭력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입법 및 정책 마련 논의가 한창인데, 영국의 입법 및 정책 사례가 참고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