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 깎인 R&D 예산 일부 보완키로, “젊은 과학자 해고 막는다”
여당 “인건비, 산학연계 예산, 혁신 R&D 예산 등 일부 증액하겠다” 양극화, 경기둔화 등 5대 위협요소 극복 위한 40개 증액 사업도 추진 정부여당 기류 달라진 계기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여당이 내년도 예산안에서 대폭 삭감된 연구개발(R&D) 예산을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일부 복원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계도 한숨을 돌리게 됐다. 최근 수년간 가파르게 급증한 예산의 효율화라는 게 여당의 설명이지만, 전문가들은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심상치 않은 데다 최근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도 패배하자 방향을 튼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의힘, 기초연구 분야 등 일부 예산 증액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3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R&D 예산 복원 등의 내용을 담은 ‘2024년 예산안 심사 방안’을 발표했다. 현재 정부 R&D 예산은 올해(31조1,000억원)보다 5조2,000억원(16.6%) 줄어든 29조5,000억원으로 편성됐다. R&D 예산 감축분 중 1조8,000억원이 교육·기타 부문 R&D를 일반 재정사업으로 재분류한 것이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설명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R&D 예산 감축 규모는 3조4,000억원(-10.9%)으로 추산된다.
특히 민간기업이 할 수 없는 장기적인 기초연구 예산까지 올해보다 1,537억원(6%) 감액돼 ‘R&D 삭감의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비판이 격화했다. 이에 여당이 기초연구 분야 등 일부 예산을 ‘핀셋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태도 변화는 지난 3일 예결위 정책 질의에서도 나타났다. 국민의힘의 과학기술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영식 의원은 이종호 과기부 장관에게 “부처가 현장과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많다”며 “정부 예산안을 존중하면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를 통해 수정,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종호 장관은 “국회 논의 단계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보완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화답한 바 있다.
이공계 R&D 장학금 및 5대 위협 요소 증액
국민의힘에 따르면 R&D 예산안의 보강은 젊은 연구자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인건비, 산학연계 예산, 중소기업 혁신 R&D 등의 예산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아울러 △인구구조변화 △양극화 △경기둔화 △사회불안범죄 △기후위기 등을 ‘5대 위협 요소’로 지목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40개 주요 증액 사업도 제안했다.
먼저 과학기술 분야와 관련해서는 이공계 R&D 장학금 지원을 대폭 늘리고, 대학 연구기관에 신형 기자재 등을 지원한다. 기초연구와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대해서는 수월성 중심으로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예산 변화에 따른 연구 현장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보완 방안을 강구할 방침이다. 또한 산학협력 예산 강화, 비메모리 반도체 등 대학연구소·중소기업 혁신 R&D 투자 등 영역에서 증액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올해보다 2천억원(-6.2%) 삭감된 연구원 인건비와 기초연구 지원 분야 예산은 일부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원 인건비, 실험을 위한 기자재 지원 등에 있어서만큼은 R&D 예산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반발에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인구구조 변화 대응과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서는 의과대학과 상급병원 내 필수 의료분야 교수를 확충하고, 지방 중소병원과 연계 진료가 가능하도록 인건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또한 육아 직장인들의 출퇴근 시간을 자율 조정할 수 있는 ‘시차출퇴근제’에 대한 장려금 지원을 중소·중견기업 육아기 근로자로 확대하고, 육아기 근로자의 선택근무·재택근무·원격근무 활성화를 위해 중소·중견기업 지원금 단가를 올릴 계획이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선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지원 대상을 현재 저소득 청년에서 저소득 전 연령으로 확대하고, 대학생 ‘천원의 아침밥’은 참여를 원하는 모든 대학에 지원한다. 또 국민연금 수급 연령 상향으로 60세 정년퇴직 후 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의 소득 공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고령자 계속고용장려금’ 사업의 지원 기간을 총 3년으로 1년 더 늘린다.
청년 주거비 부담 완화를 위해서는 청년 월세 한시 특별지원 사업의 지원 기간을 현행 1년보다 더 늘리고, 청년 도전 지원 프로그램을 이수한 청년이 취업해 3개월간 근속하면 ‘청년 응원인센티브’를 지급한다. 아울러 청년들이 거주지와 먼 곳에서 인턴 경험을 쌓는 경우 체류비를 지원한다.
경기 둔화 극복을 위해선 소상공인 이자 비용을 감면하고, 소상공인 전기요금 특별 감면을 한시적으로 신설한다. 전통시장과 상점가의 영세 소상공인 매출 회복을 돕기 위해 온누리 상품권의 사용처를 골목식당 등으로 확대하고, 발행 규모도 늘린다. 우리 농·수산물 소비 활성화를 위해 농·축·수산물 할인쿠폰 수혜 규모도 확대한다.
부정 여론 확산에 방향 튼 정부
정부·여당이 뒤늦게 R&D 예산 증액 카드를 들고나온 것은 과학기술계와 여론의 반발을 의식한 결과로 풀이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 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뒤 내년도 R&D 예산이 대폭 삭감됐고, 이에 과학기술계는 연구 위축과 고용불안 등의 이유로 거세게 반발했다.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R&D 예산 축소가 대통령 직무수행 부정 평가 요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정부와 여당의 기류가 달라진 계기는 국민의힘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당내 일각에서도 지난달 11일 보궐선거 패배 직후부터 R&D 예산의 일부라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실제로 패배 이후 윤 대통령은 “국민이 늘 무조건 옳다”며 몸을 낮췄고 민심과 민생을 더 면밀히 살피겠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했다. 지난 2일에는 과학기술인들이 대거 참석한 ‘대덕 연구개발특구 50주년 미래비전 선포식’에서 “R&D 예산을 더 확대하기 위한 실태 파악 과정에서 내년 예산의 일부 항목이 조정됐다”고 해명하고 “앞으로 연구자들이 제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돈이 얼마나 들던지 국가가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여당은 R&D 예산 증액 추진을 ‘예산 복원’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일부 언론에서 R&D 예산과 관련해 복원이라는 표현을 자꾸 쓰던데 복원이라는 표현은 정부안이 문제가 있다는 전제가 되는 것”이라며 “보완할 점이 없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복원이라는 표현 자체는 자제해 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편 예산의 구체적인 증액 규모가 드러나지 않은 만큼 최종 예산안 확정까지는 긴장감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