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유예 거부” 법안 고삐 쥔 巨野, 영세기업 생사 ‘볼모’ 잡았나
중대재해처벌법 또 다시 '뜨거운 감자', 논쟁 지점은 '유예 여부' 입법 주도권에 목매는 野, 정쟁 속 사라진 '근로자 보호'의 뿌리 "여론발 '누더기 법안' 잊었나, 건설적 논의 이어가야"
50인 미만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를 2년 연장하려는 정부 계획이 무산 직전에 몰렸다. 더불어민주당이 정부 사과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법안 상정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정부와 국민의힘이 야당 요구대로 내놓은 중대재해처벌법 취약기업 지원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대 야당이 영세기업의 생사를 사실상 정치적 볼모로 잡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두고 정치권 ‘격돌’
27일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는 이날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 처리에 합의하지 못했다. 개정안의 골자는 상시 근로자 50인 미만인 사업장(건설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인 공사)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시기를 당초 예정된 내년 1월 27일에서 2026년 1월 27일로 2년 유예하는 것이었다. 정부여당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를 적극 추진하겠단 의견이지만, 야당과의 합의는 요원한 상태다. 여야는 양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원내수석부대표가 참여하는 ‘2+2 협의체’를 구성해 네 차례 협의에 나섰으나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민주당은 개정안 처리의 전제 조건으로 준비 소홀에 대한 정부 사과, 산업재해 예방 대책 및 예산 마련 등을 요구하며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민주당이 제시한 선결 조건은 준비 소홀에 대한 정부의 사과, 산업재해 예방 대책 마련, 유예 후 2년 추가 유예 금지 등이다. 이에 정부여당은 1조5,000억원 규모의 지원 대책을 내놓으며 야당 요구에 일부 응했으나, 민주당은 “대책이 미흡하다”며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민주당 원내지도부 관계자는 “당정이 제시한 예방 대책은 확정된 예산을 찔끔 올린 짜깁기 수준”이라며 “공식 사과와 약속도 없어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전했다.
당초 정치권에선 민주당이 결국엔 50인 미만 기업의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법안 처리에 응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았다. 내년 총선을 앞둔 만큼 중소기업계와 소상공인 표심을 붙잡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이 관련 법안에 끝내 반대한 것은 입법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국민의힘이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선임해 쇄신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정국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포석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2021년 문재인 정부 때 민주당 주도로 국회에서 강행 처리됐다. 민주당으로선 정당의 정체성이 강하게 녹아 있는 법안 중 하나인 셈이다. 여기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노동계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당과 민주노총 등은 이날 국회 본관 앞에서 손팻말 시위를 벌이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 연장 논의를 즉각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유예 통과 외치는 중소기업계, “이대로면 근로자도 피해”
다만 중소기업계는 거듭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는 모양새다. 영세사업장인 만큼 준비 기간이 부족한 데다 안전 전문 인력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중소기업단체협의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사업장 내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는 언제든지 1년 이상 징역 등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며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대표가 구속되거나 징역형을 받으면 대부분 폐업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사업주뿐만 아니라 근로자도 모두 피해를 보게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14일부터 22일까지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중소 사업장 1,05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4%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답하기도 했다. 또 준비를 마치지 못한 기업의 87%는 ‘남은 기간 내에 이행 준비를 완료하기 어렵다’고 응답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박 터지는 싸움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이미 ‘몸통’은 시행 중인 만큼 이제는 불씨를 기업 전반에까지 펼치려는 민주당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간 노동자와 시민들을 위협하면서도 영락을 누리는 기업을 수없이 봐왔으니, 중대재해처벌법 통과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마냥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이 지닌 의미가 정치권에서 제대로 인식되고 있는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정당한 기준을 갖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구분 짓고 있는가, 처벌받아야 할 이들을 사로잡고 억울한 이들을 제대로 보상해 주는 정의를 집행하고 있느냐, 민주당 입장에서도 당당하게 ‘그렇다’고 이야기할 이가 있을지 다소 의문인 게 사실이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파트너변호사는 현행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 “판결과 주요 기소 사례를 분석해 보면, 검찰·법원이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너무 쉽게 유죄를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실제 검찰은 중대재해처벌법 사건의 91%(32건 중 29건)에 대해 기소 처분을 내렸고, 법원은 선고한 12개 사건에서 모두 형사책임을 묻는 판결을 내렸다. 김 변호사는 “검찰·법원이 안전보건확보의무 이행 여부에 대한 판단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 안전보건확보의무를 일정 정도 이행한 사업장에 대해서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사례들이 있다”며 “사고 나면 무조건 처벌해야 한다는 무과실·결과책임적인 사고방식이 중대재해처벌법 사건을 지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면책 가능하다지만, “영세 사업장 어려움 커”
물론 안전보건확보의무의 철저한 이행으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비한다면 형사적 면책도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기업 규모다.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완전무결한’ 안전보건확보가 현재로서 가능하느냐 하는 것이다. 50인 미만 사업장의 불필요한 범죄자 양산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실제 고용노동부의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 현황을 살펴보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의 사망사고 건수가 전체 사망사고 건수의 58%(449건 중 261건)에 달한다. 물론 영세 사업장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껏 안전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마냥 두둔해선 안 된다. 그러나 영세 사업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의무를 다했음에도 불분명한 책임 소재에 따라 범죄자로 내몰린다면, 이는 말 그대로 ‘불필요한 범죄자’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 그런데 정치권은 어찌 몇 년 전의 과거조차 쉬이 잊어 버린단 말인가. 순간적인 여론에 의해 구체적인 연결고리 없이 만들어진 누더기 법안이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꼴을 함께 지켜본 이들은 탄식을 금치 못한다. 더군다나 중대재해처벌법이 지닌 힘은 가히 엄청나다. 노사관계 사이에 완전한 벽을 세워 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50인 미만 사업장에까지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된다면 법 적용 사업장은 기존 4만3,000여 개에서 75만6,000여 개로 17배 이상 늘어난다. 정치권이 이후로도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거부를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경우 ‘사고 발생=대표 처벌’이라는 단순한 전후관계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유예 거부 이전 몸통 통과 시점부터 논란된 바 있는 책임 소재 명확화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