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총재의 경제 진단, “재정확대·저금리·부채확대로 성장하는 시대 끝나”
이 총재 “저성장 만든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찾아야” ‘대중국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저출산·고령화’ 등이 저성장 고착화 요인 효율성 떨어지는 공공·노동·금융 부문 구조개혁 통해 성장잠재력 높여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신년사를 통해 국내 경기와 물가, 금융 부문을 진단했다. 또 재정 확대와 저금리에 의존해 고성장을 도모하는 시대의 종말을 강조하며, 고령화와 저출산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일각에선 저성장 국면을 돌파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해법으로 수출국 다변화, 공공·노동·금융 부문의 구조개혁, 첨단 기술을 육성한 미래 성장 동력 확보 등의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창용, 신년사 통해 국내 경제 평가
1일 이 총재는 한은의 법정 목표인 물가 및 금융안정과 함께 경기회복을 정책 목표로 언급했다. 이 총재는 “IT 제조업을 제외하면 올해 성장률이 1.7%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돼 국민들이 경기회복의 온기를 충분히 느끼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며 “물가안정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면서도 경기회복과 금융안정에 필요한 최적의 정교한 정책조합을 찾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물가와 관련해선 여전히 리스크 요인이 잠재해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물가상승세의 둔화 흐름이 이어지겠지만 원자재가격 추이의 불확실성과 누적된 비용인상 압력 등의 영향으로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가 예상보다 더딜 수 있다”며 “대내외 정책여건의 불확실성 요인을 세심히 살피면서 물가를 목표수준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통화긴축 기조의 지속 기간과 최적 금리경로를 판단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문제에 따른 금융불안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요 선진국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화 징후, 국내 부동산 PF 위험신호 등이 감지되고 있다”며 “금융시스템 내 유동성 안전판 강화를 위해 한은 대출의 적격담보 범위를 금융기관 보유 대출채권까지 확대하고, 부동산 PF의 질서 있는 정리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이 정체된 국내 경제를 두고 구조개혁이 필요하단 지적과 관련해선 “재정의 확대와 저금리에 기반한 부채 증대에 의존해 임기응변식으로 성장을 도모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느라 충분히 살피지 못했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는 데 한은이 더 힘써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은은 지난해부터 국내 경제가 가진 구조적 문제의 대안을 다룬 연구를 꾸준히 발표해 왔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초저출산 현상이 가져온 극단적 인구구조 문제’, ‘장기 구조적 관점에서 진단한 가계부채 현황’, ‘지역별 주요 제조업의 생산 및 공급망’, ‘거점도시 중심의 균형발전 보고서’ 등을 언급하며 “다양한 부문에 대한 정책 제안을 통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저성장 기조 장기화 조짐, 근본 원인은?
이 총재의 지적처럼 지난 1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 2% 중반대로 정체된 우리나라의 저성장 기조는 최근 더욱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은 1.4%로 OECD 평균을 3년 연속(2021~2023년) 하회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2000년 이전 10%대로 급성장하던 시대가 한국 경제가 2010년대 들어 2%대로 주저앉더니,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3년 연속 선진국 평균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 국가로 전락한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기조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최근 한은이 강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OECD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13년(3.5%) 이후 올해까지 12년간 계속 낮아질 것으로 점쳤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보다 0.2%p 더 내려앉은 1.7%로 전망했다.
저성장의 근본 원인으론 반도체와 대중국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가 거론된다. 지난해 10월 국내 수출이 기저효과로 인해 1년여 만에 흑자로 돌아섰지만, 반도체 수출 부진이 지속되면서 월간 수출액은 지난해 10월부터 1년 연속 감소했다.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에 관련 업황이 악화하면 전체 수출이 저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지난해 11월까지 우리나라의 대중 수출액은 1,140억 달러(약 149조3,900억원·총수출액의 19.8%)로 2004년(19.6%) 이후 19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20%에 근접해 있다. 이렇다 보니 글로벌 경기에 악재로 작용하는 중국의 경기 부진은 유독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우리 경제는 중간재 중심의 대중 수출을 소비재 중심으로 확대하는 한편 기술개발을 통해 수출품의 대외경쟁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며 “수출시장 다변화를 통해 중국에 편중된 수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노동력 감소 상쇄할 혁신 필요”
저출산과 고령화 등의 구조적 한계도 저성장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경제 규모가 이미 커져 자본 투입량 확대에 한계가 있는 마당에, 빠르게 진행되는 저출산과 고령화까지 더해지면서 노동 투입량이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24년도 예산안 총괄 분석’에 따르면 2026년 이후 합계출산율은 0.7명으로 유지될 전망이다. 이같은 전망이 현실화할 경우 2040년 우리나라 총인구는 4,916만 명으로 인구수가 정점을 찍었던 2020년(5,184만 명) 대비 268만 명(5.17%)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이러한 전망을 바탕으로 경제성장률을 추정한 결과, 2040년대는 연평균 0.9%, 2060년대는 0.7%로 정체될 것”이라며 “인구가 더 빨리 줄어든다면 2040년대 0.7%, 2060년대에는 0.1%까지 성장률이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선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해법부터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육아휴직, 초등돌봄 확대, 사교육비 부담 축소 등 저출산 대응 정책 마련과 더불어, 출입국·외국인력·다문화가족·사회통합 정책 등을 아우르는 이민정책의 컨트롤타워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인공지능(AI), 우주개발, 로봇 등 첨단 기술을 육성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H대학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 투자나 중국 수출 등에 의존한 과거의 성장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현재 상태라면 성장률은 갈수록 낮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대외적으로는 세계적인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체 불가한 기술경쟁력을 키워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산업 전반에 걸쳐있는 규제 장벽 등을 혁파해 신산업과 고부가가치 기업들이 꾸준히 나타날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이 적극적인 역할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