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없이 사는’ 건설사? 임금체불 만연화에 칼 빼든 정부, 솜방망이 처벌조차 ‘감지덕지’
임금체불 점검 나선 정부, 건설 현장선 "이제서야" 거듭된 법 위반에도 처벌은 '솜방망이', 들끓는 정부 책임론 중소 건설사 '도미노' 우려도, "미지근한 대응에 기형적 구조 형성된 탓"
설 연휴를 앞두고 정부가 건설 현장을 대상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임금체불 점검에 나선다. 특히 유동성 위기에 처한 태영건설의 전국 105개 건설 현장에 대해서도 전수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다만 그럼에도 정부는 ‘늑장 대응’ 비판을 피해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애초 건설 업계에서 임금체불이 만연화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전 일이기 때문이다. 임금체불 및 하도급거래법 위반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란 점도 비판 대상으로 떠올랐다.
고용부 “체불 예방·청산 집중 지도 기간 운영할 것”
고용노동부는 오는 15일부터 4주간 체불 예방·청산 집중 지도 기간을 운영한다고 11일 밝혔다. 고용부에 따르면 임금체불액은 지난해 11월 기준 1조6,218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1조2,202억원) 대비 32.9% 증가한 수준이다. 이번 체불 대책은 부동산 경기 부진,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공사비 증가, 금리인상의 여파로 임금체불이 증가한 건설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건설업 체불은 3,989억원으로 전년 동기(2,639억원) 대비 51.2%나 증가했다.
고용부는 우선 역대 최대 규모의 건설 현장 일제 점검을 실시할 계획이다. 집중 지도 기간 중에는 근로감독관이 2인 1조로 공사금액이 30억원 이상의 500여 개 민간 건설 현장을 직접 방문해 체불 현황을 점검한다. 동시에 불법 하도급에 따른 임금 체불 여부도 조사한다. 유동성 위기에 처한 태영건설이 시공 중인 전국 105개 건설 현장에 대해서도 전수조사를 실시한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이 태영건설의 임금 체불에 볼멘소리를 쏟아낸 데 대한 대응이다. 재직자를 대상으로 선제적인 기획 감독도 실시한다. 신고가 어려운 특성을 감안해서다. 재직자 대상 임금체불 ‘익명 제보센터’를 운영한 결과 제보 165건이 접수됐으며, 제보 내용에 대한 근로감독 필요성 검토 후 감독에 돌입한다. 재직자 대상 선제 기획감독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외 재산 관계 수사를 강화해 재산은닉, 자금유용 등 악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한 고액․상습 체불사업주는 구속수사하도록 했다. 5,000만원 이하의 소액이라도 고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한 사업주의 경우 구속영장을 신청해 법정에 세울 방침이다. 임금체불 등 노동권 침해 사례가 빈발한 청년 취약업종을 대상으로도 1월 말까지 기획감독을 실시한다. 최근 1년간 신고 사건 2회 이상, 4대 보험료 체납 사업장 등 체불 가능성 있는 사업장 60곳을 자체 선정할 예정이다. 피해 근로자에 대한 생계지원도 강화한다. 간이 대지급금을 신속히 받을 수 있도록 처리 기간을 한시적으로 단축(14일→7일)하고 1인당 1,000만원까지 제공하는 체불 근로자 생계비 융자도 한시적(1.2.~2.29.)으로 연 1.5%에서 1.0%로 인하한다. 체불 사업주 융자 금리도 같은 기간 동안 1.0%p 인하하겠다는 게 고용부의 설명이다.
고름 터진 건설 업계, 시위 나선 노동자들
최근 건설 업계 특유의 임금체불이 심화하면서 고름이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유동성 위기에 빠져 워크아웃을 신청한 태영건설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은 직접 시위에 나서며 임금체불을 호소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서울경기북부건설지부는 지난 8일 서울 성동구 용답동 청년주택 건설 현장 앞에서 ‘임금체불 어음남발 태영건설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태영건설 공사 현장 내 하도급 업체에 고용돼 작업 중인 건설노동자들의 임금이 체불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건설노조 서울경기북부지부 강북지대가 파악한 체불 사업장은 서울 용답동, 상봉동, 묵동 청년주택 건설 현장 등이다. 이들은 “태영건설이 하도급 업체에 어음으로 대금을 지급했고, 하도급 업체는 이 어음을 현금화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태영건설 현장 전체에서 임금체불이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건설 노동자들은 대개 하청업체에 속해 일한다.
건설노조 측의 주장에 따르면 서울 중랑구 상봉동 청년주택 건설 현장에서 일한 조합원 45명은 지난해 11월분 임금 약 2억원을 이날까지 받지 못했다. 건설노조 단체협약에 따라 일한 다음 달인 지난달 15일에 지급돼야 할 임금이 그로부터 한 달이 다 돼가는 8일까지 나오지 않았단 의미다. 또 다른 태영건설 현장인 서울 성북구 용답동 청년주택 건설 현장 하도급 업체도 조합원 15명의 지난해 11월 치 임금 약 6,000만원을 주지 않다가 기자회견 계획이 발표된 날이 돼서야 지급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문제가 주목받지만, 건설사만 힘들다고 하지 정작 같이 고생하고 있는 힘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일갈했다.
‘늑장 대응’ 일삼는 정부의 ‘원죄’
임금체불 문제는 서민 생활과 직결되는 만큼 정부 차원의 보다 신속한 대처가 중요하다. 이번에 고용부가 본격적인 점검에 나선 이유다. 다만 대대적인 점검이 이뤄진 후에도 임금체불 문제가 직접 해결되진 않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애초 공사대금을 미지급한 건설사에 대한 처벌 수위 자체가 미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6년간 건설 업계의 하도급거래법 위반행위 중 평균 75% 이상이 공사대금 부실 지급이었으나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6년간 대금 부실 지급과 관련된 전체 혐의사실 857개 가운데 경고·주의 처분이 내려진 비율은 70.8%다. 고발과 과징금, 시정명령은 12%에 해당하는 103건에 불과했다. 또 공정위가 실시한 ‘2023년 하도급거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건설업종에서 원사업자가 법정 지급기일 이내 하도급대금을 지급한 비율은 94.6%로 다른 업종보다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늑장 대응을 힐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건설사의 자금 유동성이 불확실하면서 하도급대금이 미지급되는 사례가 이전부터 지속됐음에도 사태 파악이 늦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 측은 “이번 긴급점검은 문제가 터지고 난 다음에 가는 게 아니라 문제가 터질까 봐 조사를 실시하는 것”이라며 “직접 현장에 가서 하도급대금 미지급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도급대금을 미지급하거나 지연이자를 주지 않아도 처벌이 과징금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수급사업자 가장 원하는 부분은 최대한 빨리 대금을 받는 것”이라며 “원사업자가 자진시정할 경우 경고 처분을 내기 때문에 자진시정 비중이 클수록 과징금 처분이 낮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어떤 해명도 늑장 대응에 대한 변명이 되진 못한다.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은 건설 업계 전반에 임금체불을 만연화했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상당하다. 건설 업계를 관통하는 자금의 흐름 자체가 기형적으로 얽혀 당장 임금체불 관행을 끊어낸다 한들 반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철퇴가 날아들기 시작하면 일부 중소 건설사가 도미노처럼 쓰러질 수 있단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하도급거래법 위반 사항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정부의 원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