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도 돈도 부족한데” 중소기업계에 드리운 ‘중대재해처벌법’의 그림자
지난달 31일 발생한 최초의 중소기업 중대재해, 관련 부처 조사 시작 중소기업 76%는 중대재해처벌법 대책 없다? 형사처벌 위험성 수면 위로 "안전 관리 부족하면 합의도 무용지물" 중소기업계 공포감 가중
2022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최초 시행 후 2년의 시간이 흐른 가운데, 법원 선고를 받은 사건이 모두 ‘유죄’로 판결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지난해까지 발생한 중대산업재해는 총 510건에 달한다. 이 중 판결이 선고된 사례 13건은 △실형 1건 △집행유예 12건 등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중대재해처벌법 대응 여력이 충분한 대기업들이 줄줄이 유죄 판결을 받아 든 가운데, 지난달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에 본격 포함된 ‘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은 형사처벌의 공포에 떨고 있다.
최초의 ’50인 미만 중소기업’ 중대재해 발생
지난달 31일 오전 9시경, 부산광역시 기장군 소재의 한 폐알루미늄 수거 처리 업체에서 근로자 A씨(37세)가 집게차로 폐기물을 내리는 작업을 하다 집게 마스트(집게차의 집게 부분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회전판)와 화물 적재함에 끼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집게차 운전자가 운전 과정에서 A씨를 인식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로 추정된다. A씨는 사고 직후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사고 후 3시간 만인 낮 12시경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해당 사고가 발생한 기업의 상시 근로자 수는 10명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범위 확대 이후 최초의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가 발생한 셈이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사고 발생 후 해당 사업장을 찾아 “현장 자체가 협소하고 위험해 보이는데도 위험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는 보이지 않는다”며 “전형적인 재래형 사고”라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 부산지방고용노동청 등은 사고 원인 및 산업안전보건법·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최초의 ‘중대재해처벌법 수사 대상’ 중소기업이 등장하자, 업계에는 본격적인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장 중대재해처벌법 대응 여력이 충분한 대기업들도 유죄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금도 인력도 부족한 중소기업이 처벌을 피해 가긴 어려울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차후 영세 사업장에 대한 기소가 쏟아져 중소기업계 전반에 ‘범죄자’ 낙인이 찍힐 것이라는 극단적인 우려마저 제기된다.
“중소기업에 돈이 어딨나” 아직 준비 미흡해
실제 중소기업계의 중대재해처벌법 대응 준비는 상당히 미흡한 상태다. 지난해 11월 대한상공회의소가 50인 미만 회원 업체 641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을 위해 조치를 취했다고 답한 기업은 22.6%에 그쳤다. 반면 별다른 조치 없이 종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답한 기업은 39.6%, 조치 사항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한 기업은 36.8%에 달했다. 2년간 이어진 유예 기간에도 불구, 76.4%에 달하는 중소기업이 중대재해 발생에 무방비한 상태라는 의미다.
지난달 본격적으로 유예 기간이 종료된 이후에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한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업계의) 대응 상태에는 좀처럼 진전이 없다”며 “일부 소기업은 (확대된) 법 적용 대상인지 자각조차 못 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중소기업계의 중대재해처벌법 대응 상황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간단하다. 대다수 중소기업에는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등 정부의 요구에 대응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중대재해처벌법 가이드’에 따르면, 기업은 재해 예방에 필요한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 및 이행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인력 고용, 예산 투입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재해를 예방하라는 의미다. 당장 자금이 부족하고 실무 인력 채용에도 난항을 겪는 중소기업들은 이 같은 정부의 주문이 커다란 ‘벽’과 같다고 토로한다. 곳곳에서 당장 안전보건 관리 담당자 채용을 위해 투입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호소가 흘러나올 정도다.
재해 예방 노력 부족하면 ‘합의’도 소용없다
일단 중대재해처벌법의 ‘처벌 범위’에 들고 나면 합의 등 구제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 역시 업계의 공포감을 키우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유일하게 실형이 선고된 한국제강 사건은 법원의 엄격한 판결 기조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피의자였던 한국제강 대표이사는 죄를 인정하고 피해자 유족과 합의를 원만하게 마쳤다. 합의 이후 유족들이 법원에 처벌 불원 탄원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같은 정황을 참작한 이후에도 피의자를 법정 구속, 1심 실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한국제강이 해당 사건 이전에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으며, 입법 후 시행 유예 기간에도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 한국제강은 2010년과 2020년에 안전조치의무 위반 사실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2021년에는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발생해 벌금을 냈고, 이후 실시된 정기 감독에서는 재차 안전조치 의무 위반 사실이 확인됐다. 업계는 한국제강의 실형이 법원이 기업들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해석이 나온다. 기업 차원의 중대재해 예방 노력이 부족할 경우, 유족과의 합의로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를 판례를 통해 남겼다는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 대부분의 판례가 ‘집행유예’로 끝났다는 점에서 희망을 보는 기업들도 존재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명시한 안전 및 보건 조치 의무가 포괄적이고 모호한 만큼, 앞으로도 법원이 섣불리 실형을 선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당장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현저히 부족한 중소기업계가 실제 법정에서 ‘선처’를 주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