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 전쟁 장기화에 트럼프 리스크 ‘2연타’, 안보 위기 속 EU의 선택은
안보 위기 드리운 유럽 사회, EU '군사비 증액' 가시화 NATO 방위비도 '사상 최대 규모', 10년 전 대비 65% 증가 도널드 트럼프식 '안보 무임승차론', 유럽 위기론 '팽배'
EU 집행위원회가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내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사실상 승기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이자 위기론에 휩싸인 영향이다. 여기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임이 가시화되면서 유럽 사회 내 위기의식은 더욱 커졌다. 이에 러시아 지원 기업을 제재하는 등 소극적인 대처만 이어가던 유럽도 적극적인 안보 정책을 펼쳐나가는 분위기다.
EU “방위 산업에 더 많은 돈 써야”
15일(현지 시각) 우르술라 폰 데어 라이엔(Ursual von der Leyen) EU 집행위원장이 “유럽은 방위 산업에 더 많은 돈을, 유럽 내에서 더 현명한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언급했다.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EU 집행위는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고 (러시아로부터의 공급이 중단된) 가스의 공동구매에 나섰던 때와같이, 유럽인들의 세금을 활용해 방산업 육성 전략을 개발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EU 집행위는 최근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리겠단 방침을 설정한 바 있다. 이달 중 발표가 예정돼 있는 유럽 내 군산복합체 개발 계획에는 개별 회원국의 무기 구매계약 자금을 대고 계약에 대한 보증을 제공하는 데 EU 예산을 투입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이 같은 방식은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고 가스 수급을 안정화하는 과정에서 이미 활용됐다”면서 “신식 탱크를 원한다면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유럽 납세자들이 공정한 방식으로 낸 세금은 EU 내에서 쓰여야 한다”며 “EU는 방산 전략 통합 가속화를 위해 회원국들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동시에 (방산 부문에서의) 투자수익률(ROI)을 높일 것”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미국과 같은 제3국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기보다는 EU 역내 방위 산업을 키워 자체 조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가별 이해관계에 따라 파편화돼 있는 방산업 육성 전략을 중앙집권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언급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대다수 EU 회원국들이 가입돼 있는 NATO는 올해 총 3,800억 달러(약 506조5,000억원)를 방위비로 지출할 계획이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로, 10년 전 2,300억 달러와 비교하면 65%가량 늘어난 수치다. 유럽이 이처럼 강경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지정학 리스크가 커진 탓이다. 이에 대해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국제 정세가 한층 거칠어졌다”며 “유럽의 국방력 증강은 장기적 관점에서 자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함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속해서 공급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전까지 유럽은 러시아를 지원한 중국 기업을 제재하는 등 미국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맞추는 수준에서 소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잦아들 낌새가 보이지 않자 최전방에서 일종의 ‘벙커’ 역할을 하던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NATO 회의론자 트럼프, 우크라이나엔 오히려 ‘기회’?
한편 EU는 NATO에 거듭 부정적인 반응을 쏟아낸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선 거듭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경고 신호를 이해하고 있으며, 여기에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NATO 회의론자’이자 ‘고립주의자’로 알려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동맹국에 대한 집단방위 체제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NATO 사무총장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NATO가 제공하는 억지력의 신뢰성을 우리 스스로 훼손해선 안 된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에 맞섰다.
EU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거듭 경계하는 건 이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 탓이 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방위비를 부담하지 않는 나토 회원국을 공격하도록 러시아를 부추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으며 유럽 사회의 불안을 증폭시킨 바 있다.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NATO 회원국 지도자와 만난 일화를 소개하며 “NATO 지도자가 내게 ‘(NATO에) 방위비를 내지 않아도 보호해 줄 거냐’라고 물었고, 나는 ‘보호해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I said: ‘You didn’t pay? You’re delinquent?’ He said: ‘Yes, let’s say that happened.’ No, I would not protect you)”며 “오히려 나는 그때 ‘러시아가 침공을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독려할 것’이라고 했다(In fact, I would encourage them (Russia) to do whatever the hell they want)”고 밝혔다. NATO 국방비 지출의 대부분을 미국이 부담하는 것에 대해 ‘안보 무임승차론’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나온 발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에 유럽 사회에선 안보 동맹 약화 우려에 따른 불안정성이 확대됐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단 의견도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이 강해지면 전쟁의 최전방에 서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더욱 강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크라이나가 유럽 지원의 명분으로 삼는 것도 지정학적 이점에 따른 벙커 역할론이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걸 막아야 한다”며 “우리의 경제를 강화시켜 주면 우리는 당신들의 안보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러시아를 막고 있으니 지원해달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거듭된 침공과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가시화에 유럽의 정치적 피해와 안보 위협은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유럽의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