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RA로 은행권 ‘땅 다지기’, 남은 과제는 ‘거품 관리’
달아오른 RA 경쟁, 주요 은행권도 본격 진입 AI 네임 밸류 '반작용' 우려도, "지나친 수익성 기대 버려야" 침체기 겪는 RA 시장, '위험 관리' 강점에 집중해야
40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을 두고 금융권에서 로보어드바이저(RA) 경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올 하반기부터 퇴직연금에서 RA 투자일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인공지능(AI)을 적용한 자산관리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수 있단 기대감이 차오른다. 다만 불안의 목소리도 나온다. AI라는 네임 밸류에 결부된 ‘수익성 강화’라는 어긋난 거품이 시장에 반작용을 불러올 수 있단 것이다.
RA 강화 나선 은행권, AI로 제반 역량 강화하나
20일 은행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오는 4월부터 RA 서비스를 ‘마이쏠’로 일원화한다. 기준 운영해 오던 RA 서비스 쏠리치에서 신규 포트폴리오 제공을 종료하고 AI 기능을 대폭 고도화해 마이쏠에 이식한 것이다. 마이쏠은 등급별로 사전에 짜 놓은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는 통상적인 RA에서 벗어나 신한은행 자체 알고리즘으로 초 개인화된 포트폴리오 설계와 리밸런싱 등 사후 관리를 제공한다. 은행권 RA 중 가장 진일보한 솔루션이란 평가다. 신한은행은 마이쏠 집중에 이어 퇴직연금 RA 운용을 위한 협력사 선정도 검토 중이다. 이에 대해 신한은행 관계자는 “AI를 바탕으로 RA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RA 시장에 뛰어든 건 신한은행만이 아니다. KB국민은행 역시 종합 자산관리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RA 서비스 케이봇쌤 고도화에 나섰다. 지난해 연말부터 20억원(약 150만 달러) 규모의 AI 포트폴리오 구축 작업을 시작했고, 디지털 금융 기능을 대폭 강화할 전망이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상반기 선보인 디지털 자산관리 플랫폼 ‘아이웰스’를 AI 초개인화 자산관리 서비스로 확대 운용할 계획이다. 종전 RA 서비스인 하이로보는 펀드 포트폴리오 제안·관리, 아이웰스는 고객 자산관리 부문으로 이원화해 고도화한다.
이처럼 시중 주요 은행들이 일제히 RA 서비스 고도화에 나서기 시작한 건 은행권이 증권사에 점차 잠식돼 간다는 위기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하나증권, 대신증권, KB증권, 신한투자증권, NH투자증권 등 주요 증권사들은 최근 1~2년 사이 쿼터백, 콴텍, 디셈버컴퍼니 등 로보어드바이저 전문 업체들과 합종연횡을 통해 RA 부문에서 대형은행을 뛰어넘는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RA 강화를 통해 입지를 다시금 확고히 한다는 게 은행권의 주된 목표다.
RA가 ‘열쇠’?, “거품 걷어낼 필요 있어”
다만 RA 강화가 은행권 기반 강화의 실질적 ‘열쇠’가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의견이 갈린다. RA와 AI란 이름 아래 과도한 기대가 모이면서 일종의 ‘거품 효과’가 발생한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RA는 AI가 자산을 알아서 굴려주는 형식이 아니다. RA를 두고 흔히 AI라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 모든 RA가 AI인 건 아니다. 머신러닝이나 딥러닝 같은 AI 기술을 이용해 투자 전략을 제시하는 RA도 있지만 자동매매 프로그램이나 엑셀 몇 줄로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자산배분 로직도 RA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단 것이다.
특히 AI를 활용하는 RA라 할지라도 보통은 AI가 투자 전략을 제시하면 실제 투자 결정은 고객이나 자문역이 하는 경우가 많다. RA는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에 불과하단 의미다. 이에 대해 한 업계 관계자는 “모든 RA가 AI인 건 아니다”라며 “RA의 시작은 퀀트라고 하는 통계 분석이 베이스이며, AI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RA가 사람보다 수익률이 높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사람과 AI의 대결에서 AI가 거듭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투자에서도 당연히 AI가 사람보다 뛰어날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막상 RA의 수익률을 살펴보면 대부분 시장 수익률을 한참 밑도는 경우가 많다. 코스콤의 RA 테스트베드 현황에 따르면 지난 2021년 RA들의 평균 수익률은 △안정추구형 9.42% △위험중립형 18.96% △적극투자형 37.40%로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 57.86%보다 못하다. 이에 대해 김영빈 파운트 대표는 “RA 평균 수익률이 10% 안팎이라 하면 사람들은 ‘겨우 그 정도?’라고 실망하지만, 미국의 경우 지금까지 RA가 지수를 이긴 적이 단 한 해 밖에 없었다”며 “RA 기술의 요체는 내일 시장을 예측해 급등주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손실 범위 내에서 고객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RA에만 집중하다간 오히려 과도한 기대감의 반작용으로 침체기를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큰 수익성을 기대하던 이들이 일시에 떠나가면 순간적인 반동이 적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RA 업계 자체가 최근 침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우려 요소다. 코스콤에 따르면 지난해 7월 말 1조9,425억원(약 14억5,505만 달러) 수준이던 RA 테스트베드 등록 운용자산(AUM) 규모는 한 달 뒤인 8월 5,162억원으로 73% 이상 급감했다. 계약자 수 또한 동기간 37만7,126명에서 29만9,154명으로 크게 줄었다. RA의 강점이 위험관리에 있음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사전에 거품을 일정 부분 걷어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쏟아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