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만 명 ‘신용사면’ 시작, 카드사 건전성 악화 및 모럴해저드 우려↑
총선 앞두고 소액대출 상환자 신용사면 실시 대규모 신용사면에 고심 깊어지는 카드사 모럴해저드 및 신용점수 신뢰도 하락 우려도
서민·소상공인 중 소액 대출이 연체된 최대 330만 명의 신용회복을 돕는 ‘신용사면’이 시작됐다. 연체된 대출금을 오는 5월 말까지 갚으면 연체이력정보의 공유나 활용이 금지돼 신용평점이 자동으로 오르게 된다. 서민들의 경제 활동 재기를 돕는다는 차원에선 긍정적이지만, 저신용 차주의 신용카드 사용이 늘어나 잠재 부실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모럴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소액연체 5월까지 갚으면 ‘신용사면’
금융위원회는 12일 ‘서민·소상공인에 대한 신속 신용회복 지원 시행’ 행사를 열고 신용회복 지원 조치 대상과 효과 등을 발표했다. 이번 신용회복 지원 대상은 2021년 9월부터 지난 1월까지 2,000만원 이하 연체가 발생한 경우다. 대상자는 개인 약 298만 명(나이스평가정보 기준), 개인사업자 약 31만 명(한국평가데이터 기준) 등 총 329만 명으로, 오는 5월 31일까지 연체 금액을 모두 상환하는 조건이다. 대상자 중 지난달 말까지 연체금을 전액 상환한 이는 개인 약 264만 명, 개인사업자 약 17만5,000명이다. 이들은 별도 신청 없이 이날 신용회복 혜택을 받았다.
나이스평가정보는 신용 사면을 받은 개인의 신용평점이 평균 37점 상승할 것으로 추산했다. 20대 이하가 평균 47점, 30대가 39점가량 오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치가 사회초년생이나 청년 사업가의 재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금융위는 기대했다. 올라간 신용점수를 바탕으로 15만 명이 카드발급 기준 최저신용점수(645점)를 충족해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으며, 26만 명은 은행권 신규 대출자 평균 신용점수(863점)를 넘게 돼 보다 낮은 금리의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한국평가데이터는 전액 상환을 완료한 개인사업자자의 경우 신용평점이 약 102점 오른다고 추산했다. 아울러 7만9,000여 명의 개인사업자가 은행 대출이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나머지 대상자인 개인 약 34만 명, 개인사업자 약 13만5,000명도 5월 말까지 연체 금액을 전액 상환하면 별도 신청 절차 없이 신용회복이 이뤄진다.
또한 채무조정을 이용한 차주에 대해 ‘채무조정 정보’가 등록되는 기간이 2년에서 1년으로 단축된다. 서민·소상공인이 신용회복위원회나 새출발기금의 채무조정을 이용하는 경우 이 정보가 신용정보원에 등록돼 금융거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채무조정 계획에 따라 1년간 성실하게 상환하면 ‘채무조정 꼬리표’를 떼준다.
“잠재적 부실 키울 것” 카드사 비상
다만 여신업계 일각에선 이번 신용사면이 잠재적인 부실을 키울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용사면을 통한 이력 삭제가 고도화된 신용리스크 관리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신용카드 신규 발급 이후에도 추가 연체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다른 고객 피해로 전가될 수도 있다.
카드사가 긴장을 놓지 못하는 데는 현재 업계 상황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3%에 육박하는 연체율에 2금융 대출 축소 이후 상당수의 다중채무자들이 카드사로 유입되고 있어 자칫 이번 사면으로 부실만 늘릴 수 있어서다. 특히 카드사 대출상품인 카드론은 고금리에도 불구하고 급전창구라는 인식이 적지 않아 리스크 부담이 더욱 크다. 현재 40조원에 달하는 카드론 규모가 감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점도 우려를 더한다. 여기에 이달부터 연체이력정보 공유 및 활용까지 제한되면서 연체 상황 등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게 됐다.
이런 가운데 업계 일각에선 카드 한도액 조절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신용점수 600점대에도 가능했던 카드 발급은 최근 들어 카드사의 높은 연체율 부담으로 700점 이상이 돼야 심사를 넣어볼 수 있는 등 발급 기준이 더욱 높아진 상황이다. A카드사 관계자는 “당국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며 “과거 신용사면 때도 볼 수 있듯이 신용점수 회복으로 인한 무분별한 신규카드 발급을 막기 위해 카드사들이 발급 기준을 상향하거나 신용카드 부여 한도를 최저로 낮추는 등 보수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이 카드업계보다 금리가 낮은 점에 비춰볼 때 카드사에서 시중은행으로의 이탈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히 지난해 온라인 대환대출 서비스에 따라 시작된 시중은행으로의 고객 이탈은 더욱 가속할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 B카드사 관계자는 “이번 조치로 카드업계를 비롯해 제2금융권에서 시중은행으로의 대환 대출이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며 “지난해부터 이어온 카드업계 실적이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모럴해저드 부추긴다” 우려 목소리도
대규모 신용사면에 따른 모럴해저드와 신용점수 신뢰도 하락 등도 피하기 어렵다. 금융 업계에 따르면 이번 신용사면 대상자 중 일부는 지난 2021년 8월에도 혜택을 본 것으로 파악됐다. 연체 이력이 삭제된 이후 재차 연체를 했음에도 추가 혜택을 보는 셈으로 모럴해저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신용불량자의 이력이 삭제되면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에 따라 금융회사가 신용정보회사나 신용정보원에서 제공하는 신용점수를 신뢰할 수 없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기존 고신용 차주에 대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장기적 관점에서 모럴해저드로 인한 신용 질서 혼란도 발생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서민 경제활동 복귀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유사한 위기가 또다시 발생할 경우 차주들 사이에서 학습에 의한 악의적인 연체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서 IMF 직후인 1999년과 신용불량자를 구제해 준 2013년, 코로나19 때인 2021년에도 신용사면이 단행된 바 있는데, 불과 3년 만에 또 비슷한 조치가 이뤄진 만큼 경기가 어렵거나 금리가 높으면 정부가 구제해 줄 것이란 잘못된 신호로 읽힐 공산이 크다.
실제로 2003년 신용카드 빚에 시달리던 채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이 시행됐지만, 되레 부작용만 낳은 바 있다. 2003년 6월 채무 상환 기간의 연장, 신청 자격 완화와 절차 간소화 등을 골자로 하는 신용회복지원협약 개정안이 시행됐고, 같은 해 11월 이를 바탕으로 한 신용회복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어 이듬해 새로운 구제 방안들이 연달아 발표되자 채무자들 사이에선 “일단 빚을 갚지 않고 기다리면 더 유리한 대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형성됐다. 결국 카드사들의 연체채권 비율은 2002년 6.6%에서 2003년 말 14.1%까지 두 배 이상 치솟았고, 유동성 위기로 내몰리던 카드사들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채무자들의 모럴해저드 현상이 대출 금융기관들의 연체율 증가로 이어졌고 금융사의 부실 리스크와 재정 건전성까지 악화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