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따라 의결권 행사했지만 연이은 주총 패배에 밸류업 기조도 퇴색
국민연금, 장기적 주주 가치 증대 강조하며 적극적 의결권 행사했지만 효과 미미 주요 기업 주주총회에서 대주주들 영향력에 밀려 목소리 퇴색하는 중 의사결정 담당인 수책위 위원 일부 '정치권 투신'하면서 정부 밸류업 기조도 빛바래
3월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이어지고 있으나, 주주총회에서 연이어 국민연금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 올해부터 ‘스튜어드십 코드’ 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면서 국민연금의 역할론이 크게 대두되고 있지만, 주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면서 유효성 논란마저 생기는 상황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큰 저택의 집안일을 맡은 집사처럼 기관투자자가 맡은 돈을 잘 관리하도록 만든 모범규범으로 올해로 도입 6년차를 맞고 있지만, 그간 꾸준히 실효성 논란이 이어져 왔다.
최근 네이버와 셀트리온 주주총회에서도 국민연금이 반대한 사외이사가 선임되거나 이사진에 대한 보수총액 한도 제한이 상향조정됐다. 대한항공, 롯데칠성음료 등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에서도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위원회(‘수책위’) 결정이 주주들의 반대에 무산되기도 했다.
주주들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26일 네이버 주주총회에서는 국민연금이 반대했던 변재상 사외이사가 선임됐다. 셀트리온은 이날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주총에서 이사 보수한도를 종전 90억원에서 200억원으로 올리는 안건을 상정, 원안대로 가결했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은 “보수한도 수준이 보수금액에 비춰 과다하거나, 보수한도 수준·보수금액이 경영성과 등에 비춰 과다한 경우에 해당한다”며 반대표를 행사했으나 안건은 통과됐다. 통상 이사 보수한도를 조정하는 경우는 먼저 실 지급액이 한도액에 육박하는 경우, 그리고 실적이 크게 호전될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 혹은 퇴직금 지급을 대비하는 경우 등을 꼽는다. 그러나 셀트리온의 경우 작년 90억원의 한도액 중 56억원(62%)을 지급해 한도가 크게 남았다는 것이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신민철 셀트리온 사장은 이날 주총에서 “셀트리온은 작년 헬스케어와 합병하면서 양사 이사회가 통합 재구성됐다”며 “작년 양사 합산 이사보수 실적은 112억원으로 단독 이사보수였던 90억원을 상회해 이사보수한도의 증액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보수한도 확대의 배경을 설명했다. 셀트리온 헬스케어의 작년 한도액은 70억원이었다. 셀트리온 측은 국민연금 및 소액주주들의 반대에 밀려 최대 집행액을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120억원으로 약속하는 타협안을 내놓기도 했다.
주주들의 목소리에 셀트리온은 결의안과 다르게 방침을 바꿨으나 대부분은 국민연금 의결권이 제힘을 쓰지 못했다. 네이버의 경우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 등을 사유로 미래에셋생명 고문의 사외외사·감사위원 선임안에 반대했지만 이날 주총에서는 별다른 반대 없이 통과됐다.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받는 과정에서 엄정한 검증과 해소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법상 결격사유나 윤리적 결격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연금은 지난 20일 열린 롯데칠성음료 주총에서도 등기이사 보수 한도 증액과 사외이사 선임 건에 대해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롯데칠성음료 지분 11.6%(107만5,793주)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두 안건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대한항공 주총에서도 조원태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의 건에 대해 ‘주주권익 침해 행위에 대한 감시의무 소홀’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조 회장은 사내이사에 재선임됐다. HD현대중공업의 경우 이상균 사장의 사내이사 선임안건에 대해, 한화시스템의 경우 어성철 사장의 사내이사 선임안건에 대해 각각 반대했지만 역시나 원안대로 통과됐다.
주주총회 유효성 결여된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비난 잇따라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가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선 경영권에 대한 ‘힘 자랑’식 개입보다는 명확한 원칙과 기준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2018년 7월 도입된 이후 책임투자 등을 위해 주주권 강화 방침을 내세웠으나, 당시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의 지나친 간섭이 민간 기업의 경영권을 흔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들어서는 기업 밸류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정책적 지원이 이어지면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거부할 경우 지분에 투자됐던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자 국민연금의 의결권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국민연금이 자금을 회수하면 주가가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 28일 주총이 예정된 KT&G의 경우 방경만 현 KT&G 수석부사장의 대표이사 사장 선임 안건에 대해 국민연금 수책위가 승인을 표명한 상태지만, 국민연금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에 대해 시장에서는 지나친 경영 간섭이라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방 부사장의 대표이사 선임에 기업은행은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같은 날 주총이 예정된 한미사이언스의 경우도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 간의 통합이 의결 사항으로 올라와 있는 데다, 집안 내에서 통합 찬성파인 모녀와 반대파인 장·차남 간의 분쟁까지 벌어져 관심이 높았다. 수책위가 지난 26일 통합 찬성파 측 이사진에 7.66%의 의결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으나, 소액주주들의 판단에 따라 통합안이 부결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9명 위원 중 1명의 급작스런 사퇴에 의결권 행사 못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수책위는 국민연금법 시행령에 따라 9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으나, 최근 강성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여당 비례대표로 공천을 신청하며 사임했다. 강 교수가 3년 임기 중 1년도 채우지 못했다는 비난이 이는 가운데 결원이 생긴 만큼, 자칫 4:4 동률이라는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수책위는 기존과 동일하게 진행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앞서 지난 14일 금융위원회 김소영 부위원장은 “상장기업의 노력을 투자자가 제대로 평가해 투자결정 등에 반영할 때, 상장기업들이 기업가치 제고 노력을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며 스튜어드십코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7개 원칙 중 원칙 3 ‘기관투자자는 투자대상회사의 중장기적인 가치를 제고해 투자자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높일 수 있도록 투자대상회사를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조항을 개정해 국민연금이 투자금을 뺄 수도 있다는 신호를 시장에 주겠다는 발표까지 이뤄진 상태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국민연금을 비롯한 주요 연기금들의 의결권 행사 및 시장 참여를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책위 담당자가 정치권 참여를 이유로 사임하거나 주요 기업 주주총회에서 연이어 영향력을 잃으면서 정부의 밸류업 기조가 퇴색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