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무기 판매 금지’ 조치 해제한 미국, 양국 상호방위조약 타결도 근접
사우디아라비아-미국 관계 개선 수순, 사우디 무기 판매 금지도 해제
상호방위조약 타결 임박, 미국-중동 국가 간 첫 국방 조약 체결되나
미국산 무기 유입에 좁아진 방산 수출길, 한국·독일 등 손해 불가피
갈등을 거듭하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관계 개선의 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상호방위조약 타결 등 현안에 대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다. 상호방위조약이 최종 타결되면 사우디는 미군으로부터 군사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고, 미국은 중국·러시아의 중동 영향력 확대와 이란 위협까지 동시에 견제하는 군사적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미-사우디 상호방위조약 체결 초읽기
9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과 사우디가 지난해 10월 가자 전쟁 발발 이전부터 사우디 영토에서 상대국이 공격받을 경우 서로 군사 지원한다는 내용의 상호방위조약 협정을 논의했고, 최근 이 논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보도를 내놨다. WSJ에 따르면 미국은 1960년에 마련한 일본과의 안보조약을 모델로 협정 초안을 만들어 사우디 방어 약속을 재확인했다. 미국이 중동지역 국가와 공식적인 국방 조약을 맺겠다 나선 것이다. 미국은 카타르 등을 ‘주요 비(非)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해 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상호방위조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런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양국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초읽기에 들어섰단 평가가 나온다. 사우디 국영 SPA 통신은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지난달 19일 만나 양국 방위조약의 ‘확정 직전’ 단계를 논의했다고 전했다. 백악관 역시 SPA 보도 직후 미국과 사우디의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협상이 타결에 근접한 상태임을 인정했다.
한 발짝 물러선 미국, 무기 판매 금지 전격 해제
양국이 급격한 관계 개선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미국의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기 판매 금지 조치 해제가 대표적이다. 앞서 지난 2021년 1월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사우디가 예멘 내전에 개입하자 사우디와 체결한 정밀유도폭탄 GBU-39 3,000발 등 무기 수출 계약 이행을 중단했다. 미국산 무기가 예멘에서 민간인 살상에 쓰일 가능성을 차단하겠단 명분이었다.
그러다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에 대한 공격용 무기 판매 금지 조치를 조만간 해제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판매 금지 조치가 본격 해제됐다. 바이든 대통령이 무기 판매를 재개하면서까지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트럼프 전 대통령과 비교해 열세인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외교적 성과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우디를 끌어들인 셈이다.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이 크기도 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가자지구 전쟁 이후 국제유가가 폭등했는데, 산유국인 사우디를 우방으로 끌어들이면 에너지 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사우디와의 전략적 안보동맹을 토대로 중국·러시아의 중동 영향력 확대와 이란 위협까지 동시에 견제하는 군사적 교두보를 마련할 수도 있다.
사우디 입장에서도 손해가 없다. 상호방위조약이 타결되면 사우디가 침공받을 경우 미군은 사우디의 영공과 지상에 즉각적인 접근이 가능해진다. 미국의 군사력이 사우디의 ‘뒷배’가 된단 의미다. 이에 대해 박현도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미국은 궁극적으로 사우디와 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하나의 전략 차원이고, 사우디는 자국 방어와 안보가 핵심 사안이기 때문에 만약 사우디의 조건을 미국이 수용한다면 사우디로선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산 무기 공급 재개, 타국 방산 수출문은 좁아질 듯
다만 그동안 미국 대신 사우디에 무기를 공급하던 국가들은 손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력이 높은 미국산 무기가 유입되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낮은 타국 무기 수입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독일과 한국이다. 독일은 지난 1월 이리스-티(IRIS-T) 공대공 미사일 150대를 사우디에 수출하면서 방산 수출의 길을 뚫었다. 2018년 독일이 사우디의 인권침해 상황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금수 조처를 취한 지 약 5년 만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형 패트리엇’으로 불리는 국산 중거리 지대공 유도미사일에 대한 수출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당시 LIG넥스원이 사우디 국방부와 약 32억 달러(약 4조2,500억원) 규모의 천궁-Ⅱ 요격미사일 체계 수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당시 국방부는 “이번 중동 3개국 방문을 통해 지난해 우리 대통령의 중동 국빈 방문 이후 국방 분야 후속 조치를 구체화했다”며 “천궁-Ⅱ를 비롯한 L-SAM(장거리 유격미사일), 다연장 요격체계인 K-239 천무, 드론 타격체계 등 다양한 미사일·드론 요격 및 타격 무기들이 폭넓게 수출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사우디에 방산 수출길이 활짝 열리면서 국내 기업들이 사우디에 집결하기도 했다. 지난 2월 4~8일 닷새 동안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국제 방위산업 전시회(WDS·World Defense Show) 2024’에도 국내 방산 기업이 몰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한화그룹의 방위산업 계열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화시스템, 한화오션을 비롯해 현대로템, LIG넥스원 등 주요 방산업체는 최첨단 제품을 선보였다. 그만큼 사우디 시장에 대한 기대가 컸던 셈이지만, 전통적 우방국인 미국이 재등장하면서 수출문이 다시금 좁아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