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 사이 수난 겪는 ‘학생인권조례’, 충남에 이어 서울도 폐지
2010년대 체벌·규제 등으로부터 학생 인권 보호 위해 조례 제정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폐지론' 대두
조례 도입한 7개 시도 중 충남도의회 이어 서울시의회 폐지 가결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12년 만에 폐지 수순에 들어섰다. 2010년 경기도가 최초 도입한 이후 7개 시도에서 도입·운영 중인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존엄과 가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됐지만 지난해 ‘서이초 사건’을 계기로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폐지 요구가 확대되고 있다. 다만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부당하다며 대법원에 제소하겠다고 밝힌 만큼 법정에서 조례의 최종 폐지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국민의힘 다수인 서울시의회, 조례 폐지 재의 가결
25일 서울시의회는 본회의를 열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폐지조례안 재의의 건’을 상정해 무기명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 찬성 76표, 반대 34표, 기권 1표로 학생인권조례는 폐지됐다. 앞서 지난 4월 서울시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이 가결됐다. 이후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재의를 요구하면서 이날 표결이 이뤄졌다. 교육계에서는 서울시의원 111명 중 국민의힘 소속이 75명으로 가결 조건인 3분의 2를 넘어 재의 표결이 통과될 것이란 예상이 우세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이 성별, 종교, 나이,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규정했다.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제정된 뒤 2012년 서울·광주, 2014년 전북, 2020년 충남, 2021년 인천·제주 등 7개 시도가 도입했다. 이 중 가장 먼저 조례를 폐지한 곳은 국민의힘이 다수 포진해 있는 충남도의회다. 충남도의회는 폐지안 가결, 충남도 교육감 재의 요구, 재의 부결 이후 다시 폐지안 상정, 교육감 재의 요구, 재의 가결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올해 4월 최종 폐지했다.
이번에 폐지가 결정된 서울시는 즉각 법정 대응을 예고했다. 조희연 교육감은 “학교 현장의 차별·혐오 예방과 법령 위반 소지 등을 검토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대법원에 법령 위반과 무효를 주장하는 폐지안 재의결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보다 먼저 조례가 폐지된 충남도교육청도 가결 직후 학생인권조례 폐지 무효 확인의 소와 함께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지난달 30일 집행정지 신청이 대법원에서 인용돼 본안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학생인권조례는 효력이 유지된다.
학생 인권만 일방적으로 강조, 교육활동 위축 우려
학생인권조례 제정 논의가 이뤄졌던 2010년대 초는 체벌과 규제, 강제 야간 자율학습 등으로부터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이런 논의를 수용해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선출된 경기, 광주, 서울 등에서 선제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됐다. 하지만 조례 제정 이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과 관련한 차별 금지 조항을 두고 보수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폐지 요구가 흘러나왔다.
특히 교육계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학생 인권 보호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 교사의 교육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다. 조례에 명시한 표현의 자유, 사생활 보장 등이 학생들의 일탈 행위를 부추기고 교사가 이를 바로잡을 권한을 약화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해 7월 발생한 서이초 사건은 학생인권조례 폐지의 불씨가 됐다.
학부모의 극심한 민원에 시달리던 서이초등학교의 2년차 교사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동료 교사들의 분노와 절망이 국민적 공분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정부는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지목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학생 인권이 우선시되면서 교권은 땅에 떨어지고 교실 현장은 붕괴하고 있다”고 꼬집었고 윤석열 대통령도 학생인권조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정을 지시했다.
학생인권조례 논란, 보수·진보 간 정쟁으로 비화
정부가 나서면서 학생인권조례 폐지 논란은 여야, 교사단체 등 보수와 진보 진영의 정쟁으로 번졌다. 지난 4월 서울시의회와 충남도의회가 학생인권조례가 잇따라 폐지한 가운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학생과 교사를 편 가르고 교육마저 진영 대결의 도구로 악용하려는 몰상식한 행위”라며 “국민의힘이 여전히 국민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역행하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교사 단체 간에도 입장이 엇갈렸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지난 4월 29일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입장문에서 “과도하게 학생 권리만 부각한 학생인권조례의 제정 강행이 자초한 결과”라며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많은 학생의 학습권 및 교권 보호를 위해 권리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같은 날 전교조는 “교사들은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두의 인권이 존중받는 교실과 학교를 원하는 것”이라며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다고 교권 보장이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폐지를 요구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2010년대부터 보수와 진보 간의 무의미한 논리 다툼이 이어지면서 교육계 전반에 피로감이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해 교사가 학생의 문제행동에 대응할 수 있는 조치를 담은 ‘학생생활지도고시’가 제정돼 학생인권조례 조항 중 상당수는 무력화된 상황이다. 정부가 제정하는 고시가 지자체의 조례보다 상위법이기 때문에 학생은 조례를 근거로 교사 행동에 대응할 수 없음에도 결국 상징적인 조례를 두고 보수·진보 진영이 소모적인 이념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조례 없는 교육청, 다양한 인권 보호 정책 운용
교육계 전문가들은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야만 학생 인권이 보호되는 것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이번에 폐지된 서울시 조례에는 ‘대한민국헌법, 교육기본법, 초·중등교육법,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에 근거해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다른 조례에도 유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담은 권리와 자유는 조례 이전에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폐지 여부와 상관없이 학생 인권을 보호하는 데 제도적인 제한은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11개 시도에서는 학생 인권과 관련한 다양한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일례로 부산교육청은 ‘학생 자치 및 참여 활성화에 관한 조례’를 통해 학생의 자치 활동을 보장한다. 울산도 학생인권지원센터를 운영해 인권 침해 관련 상담을 진행하고 학교에서의 갈등 상황을 조정한다. 경북교육청의 경우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와 학생의 학습권 보장에 필요한 사항을 함께 담은 ‘교육활동 보호 및 학습권 보장 조례’를 제정하고 연 1회 관내 모든 학교를 모니터링한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면 인권을 침해당한 학생을 구제하는 제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서울과 충남의 경우 조례에 근거해 도입한 ‘학생인권옹호관’의 운영 근거가 사라졌다. ‘학생인권옹호관’은 인권을 침해당했거나 침해당할 위험이 있는 학생들이 구제를 신청할 경우 사건을 조사해 가해자·관계인·교육감에게 해당 행위의 즉시 중지를 비롯해 학생 인권 회복 등 필요한 구제 조치 등을 권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