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대통령 ‘베트남 국빈 방문’, 국제적 고립 탈피 목적
방북 마친 푸틴 , 11년 만에 베트남 국빈 방문
‘러시아 고립돼 있지 않다’ 신호 보낼 기회
베트남·러시아 밀착에 중국 셈법도 복잡
북한 답방을 마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1년 만에 베트남에 국빈 방문했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푸틴 대통령을 국빈으로 맞이하며 러시아와의 오랜 우호 관계를 국제사회에 과시했다.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고 실용을 강조하는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가 우크라이나 전쟁 후 고립되고 있는 푸틴 대통령에게 선물이 된 셈이다.
푸틴 대통령, 중국·북한 다음으로 베트남 선택
블룸버그와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20일 새벽(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베트남 권력 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총서기장의 국빈 초청에 따른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베트남을 찾은 건 다섯 번째며, 국빈으로 방문한 건 2013년 이후 11년 만이다. 쫑 서기장은 지난 3월 푸틴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축하하는 전화 통화를 하며 베트남에 초청했고, 이후 양측은 일정을 조율해 왔다.
양국 만남과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푸틴은 최근 미국과 더욱 깊은 유대관계를 맺은 베트남 관리들을 만날 예정”이라며 “러시아는 오랫동안 베트남의 주요 무기 공급원이었고, 푸틴은 그 위치를 고수하고 싶어 한다”고 분석했다. 또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미국의 제재를 위반하고 러시아 군사 장비를 구입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기에 베트남 입장에선 푸틴의 이번 방문이 가장 중요한 국방 파트너인 러시아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해석했다.
1950년 소련은 당시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이후 러시아는 수십 년 동안 베트남이 미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무기를 제공했다. 이러한 국방 관계는 양국 관계를 뒷받침했고, 양국은 수년에 걸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공유했다. 이를 보여주듯 푸틴은 신임 국방부 장관인 안드레이 R. 벨로우소프와 함께 베트남에 도착해 안보 문제가 이번 방문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러시아 앞세워 G2 견제 노리는 베트남
일각에서는 푸틴의 이번 베트남 방문이 러시아가 고립돼 있지 않다는 것을 서방에 과시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푸틴이 전날 방문한 북한과 중국이 서방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 것과 달리 베트남은 미국 등 주요국과 적극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역시 주요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베트남 경제는 성장하고 있으며 의류 수출에 이어선 선두 주자자리에 있다.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윌슨 센터의 프라샨스 파라메스와란 연구원은 알자지라에 “푸틴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을 통해 최근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한 국제 제재 속에서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결코 고립되지 않았다는 신호를 보내기를 바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푸틴의 베트남 국빈 방문은 러시아가 서방에서는 무시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양에서는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러시아만의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러 제재를 주도해 온 미국은 푸틴 대통령에게 정상 외교의 장을 만들어준 베트남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하노이 주재 미국 대사관은 17일 성명을 통해 “어떤 나라도 푸틴의 침략 전쟁을 홍보하고 그의 잔학 행위를 정상화하는 판을 깔아줘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난 수년 동안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을 견제할 역내 파트너로서 베트남과의 관계 강화에 공을 들이던 터다. 미국 기업들도 중국 중심의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베트남에 적극 투자해 왔다. 지난해 9월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에 방문하면서 양국 관계가 러시아·베트남 관계와 같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기도 했다. 베트남에 공을 들이는 건 미국과 갈등하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중국은 베트남이 미국의 우방이 되는 걸 경계한다. 바이든 대통령 방문 석 달 만인 지난해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역시 베트남을 국빈 방문해 ‘운명 공동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 외교 노선을 간다는 방침이다. 베트남은 정부 웹사이트에 게재한 성명을 통해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베트남이 독립, 자립, 다변화, 다자주의 정신으로 외교 정책을 적극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비동맹을 표방하는 베트남의 외교 정책은 유연하면서도 탄탄한 대나무에 견줘 ‘대나무 외교’로 불린다. 지난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할 때도 베트남은 중립을 취한 바 있다.
베트남과 가스 개발 등 중러 갈등 표면화
이런 가운데 북한과 러시아가 결속 수준을 높일 때마다 미지근한 태도로 거리를 두는 중국의 행보는 이번에도 반복됐다. 중국은 20일 전날 북·러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서도 “양자 협력 사무”라는 원론적 답변을 내놓은 바 있다. 중국은 미국 패권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동북아 안정’도 절실해 북·러에 이어 베트남과의 결속에 대해서도 속내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푸틴 대통령의 이번 베트남 국빈 방문을 두고서는 중·러 간 잠재적 갈등 요소가 내재돼 있다. 러시아가 중국이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역에서 베트남 정부와 함께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경우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하고 있으며 특히 국방은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중러 간 잠재 갈등은 푸틴이 베트남을 떠난 직후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중국군이 21일 베트남에서 가까운 남중국해 해역에서 군사훈련에 돌입하면서다. 중국해사국에 따르면 베이하이해사국은 이날 오전 7시부터 오는 26일 오후 7시까지 중국 베이부만 해역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한다. 중국이 베이부만에서 군사훈련에 나선 것은 지난해 8월 이후 약 10개월여 만이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서는 러시아와 베트남 간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이 견제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