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갈등 심화에 리스크 높아진 중국 AI 기업들, ‘싱가포르 워싱’으로 제재 우회한다
대중국 기술 제재 강화, 중국 AI 스타트업 글로벌 경쟁력 하락 전망
중국 정부 AI 규제에 리스크 커진 AI 기업들, 결국 '싱가포르 워싱' 선택
중국 기업 미 주식시장 진입 부담↑, 전환사채 시장으로 눈 돌려
미국이 대중국 기술 제재를 강화하면서 중국 기업의 ‘싱가포르 워싱(Singapore-washing)’이 본격화하고 있다. 싱가포르 진입을 통해 미국의 대중 제재를 우회하고 나아가 중국 리스크를 희석함으로써 브랜드 신뢰도를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여기에 미국 전환사채를 활용한 자금 조달도 활발해졌다. 미중갈등 등 지정학적 긴장을 해외 시장을 통해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 기업 ‘싱가포르 워싱’ 본격화
2일 블룸버그통신은 “중국 AI 스타트업들이 잇따라 본사를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전하고 있다”며 “중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미국 등 규제 당국의 조사를 피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도했다. 싱가포르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친기업 정책이 갖춰져 있어 중국 기업들이 진입하기 적합한 국가로 꼽힌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지난해 말 기준 1,1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둥지를 틀었다”며 “중국 기업의 비중도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실제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는 중국 AI 스타트업계에 직접적인 타격이 됐다. 엔비디아·AMD 등 주요 반도체 업체의 첨단 칩과 제조 장비 등을 수급할 방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달부턴 생성형 AI 열풍의 주역인 오픈AI도 자사 모델에 중국 내 접속을 차단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데이터 처리에 필요한 첨단 반도체와 기술 전반이 막혀버린 셈이다. 이렇다 보니 업계에선 “중국 AI 스타트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평가가 나온다.
반면 싱가포르에선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를 피해 첨단 AI 칩을 확보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대표적인 중립국이다. 싱가포르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중국에서와 달리 엔비디아의 최신 반도체 등을 문제없이 수급할 수 있단 의미다.
중국 내부적인 문제도 싱가포르 워싱이 만연해진 원인 중 하나다. 중국 당국이 AI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데이터 활용 규제를 강화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생성형 AI 관리 방안’을 통해 생성형 AI 콘텐츠에 핵심 사회주의 가치 반영을 요구하고 있다. AI 챗봇 등 서비스 출시 전 관련 알고리즘을 정부에 등록하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 컨설팅 업체 대표는 “중국 당국의 규제로 인해 중국에서 AI 개발자는 ‘자유로운 탐색’을 할 수 없게 됐다”며 “반면 싱가포르의 경우 AI 규제가 덜 엄격하고 (외국인의) 회사 설립도 쉬운 편”이라고 전했다.
이익 부풀리기에 중국 기업 신뢰도 하락, ‘워싱’으로 리스크 희석하나
중국 기업의 싱가포르 워싱이 자국민의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단 의견도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 기업들은 중국 내 개인투자자들에게마저 외면받고 있다. 업황이 부진한 가운데 이익 부풀리기 등 부정이 발각된 탓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반도체 기업 쭤장과기다.
지난 2007년 설립된 쭤장과기는 데이터센터 내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반도체,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다양한 디바이스의 동작을 최적으로 조절해 서버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스템반도체인 데이터 처리장치(DPU)를 개발해 왔다. 엔비디아가 DPU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어 쭤장과기는 ‘중국판 엔비디아’라고도 불렸다..
쭤장과기 위기론이 나온 건 2022년 10월부터다. 당시 쭤장과기는 매출 급감, 손실 확대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소명하라는 선전증권거래소의 요청을 받았고, 결국 지난해 4월 말 쭤장과기는 2022년 순손실이 1억4,700만 위안(약 278억원)으로 전년 대비 무려 2,670% 감소했다는 연례보고서를 발표했다. 한 달 뒤 선전증권거래소는 마이너스 손익에 매출도 1억 위안 미만이라며 쭤장과기 종목에 ‘특별관리종목(ST)’ 딱지를 붙였다. 투자 위험 경고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쭤장과기의 주가는 오히려 올랐다. 중국 개인투자자들이 쭤장과기의 성장성에 주목한 영향이다. 마침 중국 정부가 미국 견제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었던 데다 쭤장과기가 개발한 차세대 DPU가 양호한 성적으로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도 호재가 됐다. 이후 쭤장과기의 주가는 지난해 7월 14일 299.8위안(약 5만7,000원)까지 오르며 1년 새 700%의 성장률을 보였다. 글로벌 AI 열풍과 중국 반도체 산업 육성 전망 등에 힘 입어 위기를 넘어선 셈이다.
문제는 시장이 주목한 쭤장과기의 실적이 허위사실에 불과했단 점이다. 쭤장과기는 A고객사에 400개의 제품을 판매했다고 공시했지만, 실제로는 마케팅, 연구개발(R&D) 등에 30개를 소진하고 나머지는 모두 창고에 쌓아 놨다. 이 같은 혐의 내용이 밝혀지면서 쭤장과기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7월 300억 위안(약 5조6,700억원)에서 지난 4월 7억 위안(약 1,320억원)으로 97% 증발했다. 결국 쭤장과기는 오는 26일부로 상장 폐지될 예정이다.
이번 사태로 중국 성장기업에 대한 투자 심리는 크게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칩 제조업체 S2C가 재무 실적 부풀리기로 5년간 상장을 금지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사례가 또 반복되면서 중국 내 반도체 업계 전반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탓이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들의 브랜드 가치 자체가 낮아진 상황”이라며 “싱가포르 워싱을 통해 중국 리스크를 희석하려는 기업이 부쩍 많아진 이유”라고 전했다.
미 전환사채 시장서 자금 조달하는 중국 기업들
다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중국 기업으로서 자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올해 1~5월 중국이 유치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4,125억 위안(약 78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8.2% 급감했다. 국가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 기업과 투자가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 ‘반간첩법’ 시행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나마 일부 AI 스타트업의 경우 당국의 자금 지원 및 저금리 대출, 세금 감면 혜택 등을 받으며 내수 시장에서 일찍 성공을 거뒀지만,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단 뜻이다.
더군다나 미국의 대중 규제로 인해 주식시장 접근마저 어려워졌다. 실제 현재 미국 주식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경로는 거의 차단된 상태다. 지난 3년간 미국에서 기업공개(IPO)를 통해 1억 달러(약 1,380억원) 이상의 자금을 조달한 중국 기업은 민영 자동차회사 지리차 산하의 고급 전기차 브랜드 지커(Zeekr)가 유일하다. 중국 리스크가 자금 조달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이에 중국 기업들이 자금 조달처로 선택한 건 전환사채 시장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14일(현지 시각) “중국 대형 IT 기업들이 미국 금융시장에서 전환사채를 발행해 수십억 달러를 조달했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알리바바, 제이디닷컴(JD.com), 트립닷컴(Trip.com)은 5월 한 달간 83억 달러(약 11조5,000억원) 상당의 달러 표시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전환사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미 금융 당국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승인이 불필요한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동결한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발행회사 입장에서 전환사채의 낮은 조달 비용 매력이 더욱 부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알리바바의 전환사채 이자율은 0.5%인데 반해 달러 표시 전환사채 평균 이자율은 3.125%에 달한다. 이에 대해 금융권 관계자는 “고금리가 유지되는 한 전환사채는 중국 기업의 주요한 자금 조달 도구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