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일변도에 유럽 경쟁력 저하, 전 ECB 총재 “규제 완화 및 8,000억 유로 투자 이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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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개혁 촉구한 드라기 전 ECB 총재, 연간 8,000억 유로 신규 투자 강조
고질적인 규제 문제 꼬집기도, "규제 완화해 시장 자생력 제고할 필요 있어"
은행 ESG 규제로 유럽 은행 시장가치 저평가, DMA 규제에 기업 진출도 가로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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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사진=유럽중앙은행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유럽의 위기를 지적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특히 경쟁법 등 과도한 규제를 완화해 시장의 자생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간 유럽 재계는 지나친 규제 조치에 몸살을 앓아 왔다. AI 법이나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안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유럽 은행을 대상으로 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는 유럽 은행의 시장가치 저평가 등 실제 부작용을 초래한 것으로 분석된다.

드라기 전 총재 “유럽 경쟁력 뒤처지고 있다”

10일(현지 시각) 드라기 전 총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 발표 자리에서 유럽의 경쟁력이 뒤처지고 있다고 역설하며 “EU는 혁신을 위해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쟁력 있는 경제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연간 7,500억~8,000억 유로(약 1,114조~1,188조원)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미국과 중국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 지원 정책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만큼 유럽도 공격적인 투자를 이뤄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드라기 전 총재는 기성 완성차 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단 점을 유럽 경쟁력 저하의 원인으로 꼽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등 선진 국가들이 소프트웨어, 디지털 등 최신 기술 분야의 연구·개발(R&D) 지출을 확대하는 가운데 유럽은 여전히 자동차 생산 업체가 R&D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드라기 전 총재가 “유럽이 자동차 산업에 치중된 ‘중등 기술의 함정(middle technology trap)’에 빠졌다”며 강한 어조의 비판을 가한 이유다.

이에 드라기 전 총재는 전기차를 비롯한 청정기술 제조업체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정기술을 통해 탄소중립 경제를 창출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나아가 유럽의 경제적 기반을 다져야 한단 것이다. 이어 신기술 개발을 위해 유럽 기업 간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현재는 중국, 러시아 등 EU의 잠재적 적성 국가들이 EU 공급망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며 “통신 등 일부 시장에서 특정 기업이 시장을 통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경쟁력을 제고해야 할 때”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선 EU가 경쟁법을 완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규제를 완화해 시장의 자생적인 성장을 도와야 한다는 설명이다.

과도한 규제에 EU 구성원 피로감 가중

드라기 전 총재의 경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유럽의 고질적인 규제 문제를 꼬집었단 점이다. 그간 유럽에선 EU의 과도한 규제 조치에 재계가 볼멘소리를 쏟아내는 상황이 자주 연출돼 온 바 있다. EU의 세계 최초 AI 규제인 ‘AI 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은 규제를 어길 경우 4,000만 유로(약 573억원)나 전 세계 매출의 7%까지를 벌금으로 물릴 수 있도록 했다. 또 생성형 AI와 관련해선 훈련 데이터셋에 저작권을 명시해 공개하고 오·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도록 의무화했다. AI 기술의 가치 보존 및 악용 방지를 위해 마련된 법안이지만, 업계에선 “기술적으로 어려운 요구 사항이 많고 처벌도 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AI 법으로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단 지적도 나왔다. 지멘스, 까르푸, 르노 등 EU 기업의 경영진 160여 명은 유럽의회 의원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AI 법은 높은 법 준수 비용과 불균형한 책임의 위험을 불러 혁신적인 기업과 투자자를 유럽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안을 두고도 설왕설래가 오갔다. 앞서 지난 4월 EU 이사회는 도로 교통 오염물질 개편안인 ‘유로 7(Euro 7)’을 최종 채택했다. 타이어나 브레이크의 미세먼지(PM10·지름이 10㎛ 이하인 입자)가 순수 전기차는 km당 3mg,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전기차, 연료전지자동차는 7mg, 내연기관 대형 승합차는 km당 11mg을 넘어선 안 된다는 게 골자다. 이 외에도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배터리가 담보해야 할 최소한의 내구성을 명시하고, 종전의 규제안인 유로 6 대비 더 강력한 배기가스 규제도 적용됐다. 유로 7의 도입 시점은 오는 2026년 초다.

유로 7이 최종 채택되자 유럽 완성차 업계에선 불만이 쏟아졌다. 잇단 환경 규제로 중국 등 역외 국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높아졌단 것이다. 이사회 협상안 채택 과정에선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등 8개국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바도 있다. 환경 관련 비용 급등으로 업계 경쟁력 전반이 저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EU의 과격한 규제 일변도 정책에 구성원의 피로감만 가중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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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A 규제에 AI 기능 출시 거부한 애플, “규제 부작용 나타나고 있어”

최근 EU의 규제가 유럽의 글로벌 경쟁력 저하를 초래했다는 구체적인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레버 와그너 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 연구센터 소장은 지난 8월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한국인터넷기업협회와 CCIA가 공동 주최한 온라인플랫폼 규제 동향에 관한 국제세미나에 참석해 “EU의 디지털시장법(DMA)으로 유럽은 AI를 비롯한 IT 경쟁력이 크게 약화했다”고 언급했다. 한국이 DMA를 바탕으로 한 플랫폼 규제 추진을 타진하자 DMA의 부작용을 설명하며 플랫폼법 제정을 극구 제지한 것이다.

지난 3월 본격 시행된 DMA는 거대 플랫폼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방지하고자 일정한 규모의 플랫폼 사업자를 ‘게이트 키퍼’로 사전 지정해 규제하는 법안이다. 현재 구글 모회사 알파벳,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를 비롯해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게이트 키퍼로 지정됐으며, 이들 기업은 플랫폼에서 자사 서비스의 우선 노출 금지 등 규제를 받고 있다.

와그너 소장은 당시 세미나에서 “(DMA 도입 이후) 규제 준수 비용, 규제 요건의 복잡성, 규제 미준수에 따른 막대한 벌금 리스크 등으로 기술 기업이 AI 등 신규 서비스 출시를 유럽에서 출시하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결과가 초래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DMA 규제로 인한 AI 기술 개발 장벽은 유럽이 글로벌 AI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는 요인”이라며 “최신 AI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저해는 EU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EU 전체 GDP 성장률 저하를 불러왔다”고 일갈했다. 실제 지난 6월 애플은 DMA 규제를 문제 삼으며 “EU에 ‘애플 인텔리전스(Apple Intelligence)’ 등 주요 AI 기능을 출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은 바 있다.

유럽은행협회(EBF)도 유럽의 ESG 규제가 유럽 내 은행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내용의 분석을 내놨다. EBF에 따르면 유럽은행감독청(EBA)은 지난 1월부터 새로운 ESG 규정을 도입해 은행들이 보유한 자산의 ESG 리스크를 파악하고 측정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상세한 포트폴리오 분석부터 시장 상황 시나리오 분석을 통한 리스크까지 예측해 대책을 세우도록 압박을 강화하기도 했다.

문제는 해당 규제가 오로지 유럽 은행에만 적용되고 있단 점이다. 현재 미국 은행들은 공화당 등의 반대로 ESG 규정 도입이 늦어져 상대적으로 규제에서 자유로운 상황이다. 이처럼 규제가 불균형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강한 규제를 적용받는 유럽 은행의 기업가치가 미국 은행 대비 크게 저평가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4월 기준 JP모건의 시장가치가 보유 자산 대비 1.9배, 모건스탠리가 1.7배로 파악된 반면 유럽 대표 투자은행인 BNP파리바는 0.7배, 도이체방크는 0.5배에 불과했다. 과도한 규제라는 ‘댐’이 유럽 경제라는 강의 흐름을 가로막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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