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으로 번지는 미중 갈등, K-조선 글로벌 지배력 강화 ‘청신호’
중국 조선업까지 겨냥하는 미국 제재 칼날
K-조선 반사이익 기대감 상승, 韓美 협력 강화
사양산업 취급받던 조선업, 호황기 신호탄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전쟁이 조선업계로 전선을 넓혀가는 가운데, 글로벌 선박 시장에서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국내 조선사들의 반사이익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국의 해양 굴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의 조선사들과 협력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미중 간 긴장 고조가 국내 조선사들이 상선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 외에도 미국 해양 방산 시장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美·캐나다·EU, 중국 조선업 견제
24일(현지시간) 영국 조선·해운시황 분석업체 클락슨에 따르면 중국은 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선박을 건조할 때 실질적인 작업량을 수치화한 것) 기준으로 지난해 글로벌 조선사 인도량 6,447만 CGT 중 3,280만 CGT를 인도하며 50.9%를 차지했다. 이어 한국 조선사 1,832만 CGT(28.4%), 일본 조선사 994만 CGT(15.4%) 순이다. 미국 조선사는 61만 CGT로 전체 인도량의 0.1%에 불과했다. 미국의 선박 건조능력은 40년 전만 해도 세계 1위였으나 현재는 세계 19위로 떨어진 상태다. 반면 중국은 최근 20년 동안 연간 미국 생산량의 3배 이상의 선박을 만들어 내며 글로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로벌 조선업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확대되자 미국은 견제에 나섰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최근 항만에서 사용 중인 중국산 STS 크레인(Ship to Shore Crane·배에 실린 컨테이너를 육상으로 옮기는 크레인)에 25%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전미철강노조(USWA) 등 미국 주요 노동조합의 청원에 따른 조처로, 앞서 미국 5개 노조는 지난 3월 중국의 조선, 해운 물류 산업의 불공정 관행을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USTR에 접수했다. 중국 정부가 세계 조선, 해양, 물류 산업을 장악하기 위해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춰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전 세계에 항만과 물류 시설망을 구축한 뒤 미국 선박과 해운사를 차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현재 미국 내에서는 중국 정부가 보조금 등 각종 특혜로 중국 조선업을 지원해 미국 조선업이 피해를 봤다는 의견이 팽배하다.
이에 조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법 301조(슈퍼 301조)를 발동하고 중국 조선·해운업에 대한 조사에 돌입, 자국 항만 내 200개의 중국산 크레인을 대상으로 사이버 위협 평가를 내렸다. 중국산 STS 크레인이 원격 제어·서비스·프로그램이 가능한 만큼 중국의 ‘스파이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해안경비대에 해양 운송체계를 사이버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여기에는 크레인 생산 기반을 미국에 두는 데 5년간 200억 달러(약 26조7,000억원)를 투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중국을 견제하는 움직임은 캐나다에서도 포착된다. 캐나다해양·조선협회(CMISA)는 이달 초 캐나다 정부에 현재 중국산 전기차에 부과하는 관세율 100% 조치를 선박까지 확대할 것을 요청했다. CMISA는 중국산 선박이 캐나다 산업과 국가 안보에 중대한 전략·윤리적 위협을 가한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 조선소가 상선 외에도 중국 해군을 위한 군함을 건조해 북극해 등에서 캐나다의 이익에 잠재적 도전이 되고 있다는 의견을 정부 측에 전달했다.
유럽연합(EU)에서도 대중국 규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럽조선소·해양장비협회(SEA유럽)는 올해 초 유럽의회(EP)에 포괄적 유럽 해양 산업 전략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SEA유럽은 “선가 차이가 30~40%나 나는 것에 더해 중국 은행이 제공하는 각종 인센티브 때문에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는 선주가 많다”며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유럽 조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WSJ “韓 조선업, 美-中 해군력 격차 줄일 열쇠”
이 같은 중국 조선업에 대한 각국의 견제 움직임은 국내 조선업계에 반사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분야는 미국 해군 함정 사업이다. 최근 중국은 아시아 패권을 쥐기 위해 해군력을 급격히 증강하면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함정 보유수에서 중국(370척)은 미국(292척)을 앞지른 상태다.
글로벌 해양 패권은 지난 100여 년간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에서 미국으로 승계돼 왔다. 그러나 미국보다 앞서 조선산업이 쇠퇴한 영국에서는 이제 중형급 구축함 1척 건조에 11년이 걸릴 정도고, 미국도 존스법(Jones act)에 따라 상선건조산업의 명맥만 유지할 뿐, 수익성 높은 군함을 건조하는 조선사들은 급격한 사업 기반 축소 현상에 고민하고 있다. 해양 세력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는 미국이 해양 물류와 인프라는 물론, 해군력 자산 유지 역량에 대해 자성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미국이 선택한 것은 세계 조선업계에서 중국과 함께 2강을 형성하는 한국과의 협력이다. 미국은 현행법상 군함을 외국에서 건조할 수 없는 만큼 HD현대중공업 등 한국 조선업체들이 미국에서 직접 조선소를 운영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난 2월 울산을 방문한 카를로스 델 토로(Carlos Del Toro) 미국 해군 장관은 HD현대 인사들에게 “미국에 투자하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지난 6월 한화그룹이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리조선소(Philly Shipyard) 지분 100%를 인수하는 계약을 맺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미 해군은 한화그룹의 필리조선소 인수가 중국과의 경쟁에서 필수인 미국 조선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환영했다.
WSJ도 중국과의 해군력 격차를 줄일 열쇠로 한국 조선업을 지목했다. 23일(현지시각) WSJ는 ‘세계 최대 조선소에서 중국에 맞설 동맹 찾는 미국’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은 해양 지배력이 커지고 있는 중국에 필적하는 조선 역량과 노하우, 인재를 보유하고 있다”며 미국 해군 함정 사업 협력 논의 대상인 한국 조선업계의 장점을 소개했다.
첫손에 꼽힌 것은 대규모 생산능력이다. HD현대의 경우 울산 본사에 설치한 10개의 드라이 독(선박건조 설비)에서 매년 40~50척의 군함과 상업용 선박 주문을 소화하며, 1만4,000여 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이 필요에 따라 군함이나 상업용 선박 건조 현장에 배치된다. 한 조선소에서 군함과 상선을 동시 건조할 수 있어 수요 변동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은 생산 효율성 면에서 또 다른 강점이라고 볼 수 있다. WSJ는 이 같은 유연성이 미국이나 유럽 조선업체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라며 HD현대가 외부 영향을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주문에 대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조선업체들이 이미 뉴질랜드, 필리핀, 페루 등 여러 국가의 해군 함정을 건조한 경험이 있는 데다 탄탄한 인력·기술력을 보유해 비용 효율성 면에서도 미국에 훨씬 앞선다는 점도 강점으로 언급됐다. WSJ는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해 “같은 사양의 함정을 미국에서 건조할 경우 한국보다 2배 이상 비용이 들고, 건조 기간도 3분의 1 정도 더 길어진다”고 설명했다.
17년 겨울 끝났다, 슈퍼사이클 맞은 조선업계
이런 가운데 업계에선 혹독하고 길었던 조선업의 겨울이 완전히 끝났다는 평이 나온다. 2000년대 들어 호황 쾌속선을 타고 달리던 국내 조선업은 2010년대 중반,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조선사들이 약진하면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2020년대를 기점으로 업황이 다소 회복되긴 했으나 ‘사양 산업’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예전의 명성을 되찾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팽배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조선업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달라지는 모습이다. 몇몇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나고 있어서다. 선박 가격 흐름을 보여주는 지수가 대표적이다. 영국 조선해운시황 전문기관인 클락슨이 집계한 ‘신조선가지수(Newbuilding Price Index, 새로 건조하는 선박 가격을 지수화한 것)’는 이달 초 189.7을 기록했다. 이 지수가 180 이상에서 움직인 건 2007년 11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이어진 10개월 동안이 마지막으로, 2008년 8월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191.5)까지 넘볼 태세다.
시장 컨센서스도 긍정을 가리키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의 경우 2022년 3,55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다가 지난해 2,823억원 흑자 전환했는데, 올해는 9,400억원 수준으로 영업이익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시장 예측이다. HD현대중공업(1,786억원→5,000억원), 삼성중공업(2,333억원→4,279억원)도 올해 영업이익 증가가 예상된다. 지난해 1,96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한화오션은 올해 2,000억원가량의 흑자를 볼 것으로 시장은 전망하고 있다.
올해 국내 조선 기업들의 수주 상황도 순조롭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조선 3사가 쌓아둔 수주잔량은 3년 6개월~4년 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조선사는 최소 2년 치 일감을 갖고 있어야 독을 놀리지 않는 만큼 수주잔량 마지노선을 2년으로 잡는데 이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 같은 수주잔량 포화는 조선사의 이익 증대로 이어진다. 발주사가 아닌 공급사가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비싼 배만 골라잡는 ‘선별 수주’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에 의해 부진을 면치 못했던 국내 조선업이 중국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