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총재 “대학이 지방 학생 80% 선발하면 수도권 과밀화 개선될 것”
8월 한은 보고서에서 대학의 '지역별 비례선발' 제안
수도권 집중 문제의 폐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제시
"특정 지역만 상위 대학 진학하는 게 오히려 비정상"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위권 대학의 지역별 비례선발을 재차 언급했다. 지난 8월 한은이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 방안’ 보고서를 통해 대학이 지역별 학령 인구 비율을 반영해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고 제안한 이후, 이 총재는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라며 지역별 비례선발이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주장해 왔다. 다만 한은의 제안에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들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창용 총재 “전 세계 어느 대학도 성적만으로 선발하지 않아”
30일 이 총재는 서강대학교에서 ‘글로벌시대 세상을 이끄는 사람들’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이 총재는 한국의 경제 성장률에 대해 “전 세계가 4~5% 성장하는데 한국만 잠재 성장률이 2%면 낮다고 하겠지만, 전 세계가 0% 성장할 때 2% 성장률은 높다고 볼 수 있다”며 “경제 상황이 어떻든 어려운 상황은 늘 있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는 하는데 객관적으로 헬조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한국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라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수도권 집중 문제의 해결책을 묻는 질문에도 의견을 밝혔다. 이 총재는 “중학교 때부터 강남 학원에 다니려고 서울로 올라온다”며 “한은도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수도권 과밀화에 대한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결책 중 하나로 지역별 고등학생 수를 비례해 신입생을 선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전국 대학생 중 지방 학생이 84%이고 서울 학생은 16%에 불과하다”며 “대학이 지방 학생 80%를 뽑겠다고 비율을 정하면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총재는 “전 세계 어느 대학도 성적만으로 학생을 뽑지 않는다”며 “실증적으로도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는 게 반드시 공정한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성적순으로 선발하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꽉 차 있다”며 “강남권 등 서울에 대한 역차별이다.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은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방 학생 비례 선발은 이미 전 세계 대학에서 보편적인 방식이라며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겠지만 여러 지역의 학생을 선발해 대학의 다양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과별 선발이 어려우면 ‘전체 정원의 80%’ 선발도 가능
이 총재가 교육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30일 이 총재는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대학 선발 제도에 대해 쓴소리를 내놨다. 올해 8월 한은이 보고서를 통해 ‘상위권 대학의 지역 비례선발제’를 제안한 뒤 강남 역차별 등 논란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 이 총재는 “보고서의 취지는 성적순으로 뽑는 게 가장 공정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 것”이라며 “이미 각 대학이 20% 정도 지역 균형 선발을 하고 있는데, 이걸로 해결되지 않으니 더 크게 보자는 관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14일 한은 본관에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또다시 지역 비례선발제를 언급했다. 이날 그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이 한은이 제안한 지역별 비례선발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의 질문에 “전 세계 어느 국가도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만 뽑지 않는다”며 “왜 우리만 꼭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해야 하는지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 큰 문제는 대학들의 의견이라고 생각한다”며 “한은은 비정상을 정상화하자는 것”이라고 강하게 지적했다.
이 총재는 또 “서울대의 경우, 모든 모집 단위에서 할당이 가능한 지역별 지원자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학과 별로 뽑지 않고 전체의 80%를 지방에서 뽑겠다고 하면 모집 단위를 유지하면서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입 방식 자체를 학과 별 선발 대신 단과대학이나 학교 차원으로 모집단위를 확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냈다. 이 총재는 “고등학생이 어떻게 전공을 선택할 수 있겠냐”며 “현행 학과별 선발 방식은 교수들이 좋은 학생을 확보하려는 차원이기 때문에 모집 단위의 장벽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美 등 서구권 대학, 적극적 우대 조치로 학내 다양성 확보
이 총재와 한은이 주장하는 지역별 비례선발제는 미국의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와 맥락을 같이한다. 1960년 존 F. 케네디 행정부는 소수 인종을 차별하지 않도록 적극적 우대 조치를 도입했고 이후 60년간 미국 대학은 인종과 출신국가 등에 초점을 둔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시행해 왔다. 다만 지난해 미국 대법원이 하버드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인종에 기반한 적극적 우대 조치’를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앞으로는 인종보다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도입한 이후 적극적 우대 조치는 현재 전 세계에 보편적인 입학 정책으로 적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1981년 ZEP(Zone d’Education Prioritaire) 정책을 도입해 경제적·사회적으로 어려운 지역의 학생에게 더 많은 교육적 지원을 제공해 모든 학생에게 공정한 교육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컨텍스트 기반 입학 정책(Contextual Admission)’ 을 통해 대학 지원자의 학업 성적 외에도 사회적·경제적·지역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입학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서구권 대학의 적극적 우대 조치는 단순히 교육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조치가 아니라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진화했다. 미국 명문대학의 학생 선발 시스템은 학생의 잠재력과 미래 성장 가능성에 기준을 두는데 이때 지역별 비례선발제는 학내 지역적·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특히 획일화된 선발 기준으로 숨어있는 인재를 놓치는 ‘잃어버린 인재(Lost-Einsteins)’ 현상을 완화하고 학내에 포용과 교류의 문화를 조성해 창의력과 적응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종합적 평가(Holistic Admissions) 시스템을 채택해 학생의 잠재력·도전정신·다양성 등을 다각적으로 평가하는데 한국과 달리 학교 성적이나 SAT 외에도 추천서, 에세이, 특별활동 기록 등을 면밀히 살펴본다. 이 중에서도 특히 ‘도전적 학습(Rigor of Secondary School Record)’은 중요한 평가 요소 중 하나로 지원자가 고등학교에서 얼마나 난이도 높은 과목을 선택해 어떤 결과를 냈는지를 확인해 학업에 대한 열정과 성장 가능성을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