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합의 눈앞에 둔 반도체법, ‘주 52시간 예외’ 쟁점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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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당론 발의한 반도체 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포함
삼성전자 등 주 52시간 발목 잡혀 해외 경쟁사에 밀려
엔비디아·TSMC, 사실상 '24시간 R&D 운영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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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이 당론으로 발의한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이하 반도체 특별법)’에 ‘화이트칼라 면제(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조항이 포함됐다. 반도체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기존 법안에 노동 시간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연구개발(R&D) 직종 등에 한해 근로시간의 자율성을 높여 산업 경쟁력을 키우자는 취지로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위기와 맞물려 재계의 목소리를 수용했다. 하지만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반론이 만만치 않은 민감한 사안인 만큼 특별법 처리 자체가 지연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與, 반도체 R&D 종사자 연장근로 특례 규정 추진

11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인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주52시간제 적용 예외, 직접 보조금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특별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반도체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방위적 지원에 나서겠다는 취지로 국민의힘 당론에 따른 것이다. 앞서 지난 8월 한동훈 대표는 당대표 취임 후 첫 민생대책을 발표하며 반도체 특별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이후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고동진 의원과 박수영, 송석준 의원이 각각 발의한 반도체 법안을 기초로 통합안을 마련했다.

특히 이번 반도체 특별법에서는 신상품 또는 신기술 R&D 등 업무 종사자의 경우 당사자 간 서면합의 시 노동시간, 연장·야간 및 휴일 노동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특례 규정을 뒀다. 반도체 산업 고연봉 전문직에 한해 당사자 간 합의로 주52시간제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소위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로제를 완화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을 펼치는 기업의 족쇄를 풀어주자는 취지로 최근 반도체 사업의 위기와 맞물려 이 같은 정·재계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추세다.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는 미국과 일본이 시행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미국은 고위 관리직·행정직·전문직·컴퓨터직·영업직에 해당하면서 주 684달러 이상을 버는 근로자, 연 10만7,432달러(약 1억5,000만원) 이상 고소득 근로자를 근로시간 규제에서 예외로 둔다. 일본 역시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통해 금융상품 개발·자산 운용·유가증권시장 분석·컨설팅·R&D 등 다섯 가지 업종 근로자 중 근로소득이 연 1,075만엔(약 9,750만원) 이상이면 근로시간 및 초과근로수당 등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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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R&D 분야, 주 52시간 넘기면 근무 강제 중단

당초 여당은 야권의 반대를 고려해 이 규정을 법안에 넣는 걸 머뭇거리다가 ‘삼성전자 위기론’이 제기될 정도로 반도체 경쟁이 치열해지자 결국 산업계 요청을 수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유연한 인력 운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4월 발표한 ‘기업이 22대 국회에 바라는 입법 방향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은 응답 기업의 20.8%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우선 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

그동안 획일적 주 52시간제가 첨단 산업 분야의 국내 기업이 글로벌 경젱사에 밀리는 주요 원인으로 꼽히면서 업계에서도 핵심 인력이 신기술 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에 대한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R&D 인력의 경우 1개월 단위 탄력근로제를 적용받는다. 주 단위가 아닌 한 달 평균 주 52시간 근무를 맞추는 방식으로 이를 어길 경우 인사팀이 사업부에 메시지를 전달해 해당 인력의 근무를 강제적으로 중단시킨다. 고객사와의 납품 기일에 맞춰 원하는 성능·수율을 확보하기 위해 회사 몰래 근무하는 사례도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반면 삼성전자의 경쟁사들은 근로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 예외 조항 덕에 사실상 24시간 R&D 운영체계를 갖췄다.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며 AI 반도체를 앞세워 시가총액 세계 1위 기업에 오른 엔비디아는 연구원들이 막대한 보상을 받는 대신 주 7일, 새벽 2시까지 근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AI 칩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서버 고객사의 주문이 폭주하고 있는 데다, 특히 생성형 AI 도입 이후 업체들의 요구사항도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AMD 등 대표적인 AI 칩 설계업체의 칩 제조를 맡고 있는 TSMC 역시 마찬가지다. 대만 TSMC 연구개발팀은 하루 24시간 3교대를 통해 릴레이식으로 R&D 인력을 운영해 밤낮없이 기술 개발과 연구가 이어지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류더인 TSMC 전 회장은 지난해 6월 미국 애리조나 공장 직원들의 근로시간 불만과 관련해 “장시간 근무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野 “근로시간 예외 적용 논의하면 법안 처리 늦어져”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특별법 처리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노동시간 예외 적용에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이재명 대표와 한국경영자총협회 간담회에 참석한 후 기자들과 만나 “경총 측과 반도체 특별법에 관해 얘기했는데 이미 우리 당도 제출한 법안들이 있다”며 “다만, 연장 근로 등 다른 이슈들을 연계하게 되면 처리 속도가 늦어지니 압축적이고 핵심적으로 정리해서 신속하게 진행하자는 얘기가 있었다”고 전했다.

민주당의 반도체 특별법을 이끌고 있는 김태년 의원은 “노동 이슈는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주 52시간 근로 예외 적용을 법안에 담으려면 어떤 업종에 적용할지, 소득 등 대상 조건은 어떻게 할지 등 검토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특별법에서 직접적인 재정 지원 등 우선적으로 논의하고 처리할 게 있는데 새로운 이슈를 가져오면 법안 처리가 지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철규 의원도 이날 법안 발의 직후 기자들이 민주당의 반대와 관련한 입장을 묻자 “직접 지원의 경우 강제 규정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임의 규정으로 넣기로 했다”며 “노동시간도 화이트칼라 근로자들에 대한 근로기준법 제외가 아니고 반도체 R&D 분야 종사자들에 대해 제한적으로 하는 방안 등을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여야가 이견을 좁힌다면 반도체 특별법은 국회 상임위와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를 거쳐 이르면 오는 28일 국회 본회의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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