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지정제 대신 ‘사후 추정제’ 띄운 정부, 플랫폼 업계 반발에 꼬리 내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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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플랫폼법 제정 포기, 사전 지정제→사후 추정제로 선회
플랫폼 업계 "플랫폼법 부작용 우려 커, 사전 규제도 효용성 없다"
신속성 떨어지는 사후 추정제, 시장 점유율 등 지표 계산에만 수개월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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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규제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플랫폼공정경쟁촉진법(플랫폼법) 제정 및 ‘사전 지정제’ 도입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사후 추정제’를 대신 도입하겠단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업계에서 플랫폼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하자 타협책을 내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사후 추정 방식의 효용이 사전 지정제 대비 확연히 낮은 만큼,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의 노선 선회 방침에 회의적인 의견이 쏟아진다.

공정위 ‘사전 지정제’ 도입 포기

10일 공정거래위원회는 ‘플랫폼 공정 경쟁 촉진을 위한 입법 방향’을 발표하며 “플랫폼법을 새로 만들지 않고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이어 나갈 것”이라며 “사전 지정제도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전 지정제란 빅테크 플랫폼을 ‘지배적 플랫폼(독과점 사업자)’으로 정해 놓고 이들이 기득권을 바탕으로 다른 플랫폼이나 입점 업체에 불리한 반칙 행위를 자행했을 때 일반 기업에 비해 더 신속하고 강한 규제를 가하는 방식을 뜻한다.

공정위는 사전 지정제를 배제한 대신 사후 추정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독과점 플랫폼의 반칙 행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정 기준을 넘어서면 지배적 플랫폼으로 추정해 제재 수위를 높이겠단 것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사후 추정제 기준에 따라 지배적 플랫폼으로 인정되면 과징금 부과율이 현행 ‘관련 매출액의 최대 6%’에서 ‘최대 8%’로 올라간다.

이외 공정위 차원에서 ‘위반 행위를 당장 그만두라’고 임시 중지 명령을 부과할 수도 있고, 독과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플랫폼 측으로 넘어가는 만큼 플랫폼 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수도 있다. 공정위는 이 같은 공정거래법 개정안만으로도 독과점 플랫폼 제재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반발에 플랫폼 규제 노선 바꾼 듯

공정위가 플랫폼 규제 방안의 노선을 급격히 선회한 건 그간 업계를 중심으로 플랫폼법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스타트업계와 벤처업계에선 플랫폼법을 ‘혁신을 저해하는 악법’으로 규정하며 입법 반대를 부르짖어 왔다. 이들이 내놓은 주장의 골자는 ‘플랫폼 업계에 대한 법적 규제가 세계적 추세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업계 관계자들은 플랫폼 규제 법안의 원조 격인 유럽과 한국의 배경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유럽은 자국 플랫폼 기업이 없고 미국의 빅테크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 강력한 규제가 필요한 반면, 한국은 네이버와 카카오 등 토종 플랫폼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 무조건적인 규제의 필요성이 적단 것이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플랫폼을 먼저 규제하는 플랫폼법 특성상 법안 발효 시 해외 플랫폼 기업이 한국에서 득세하는 역효화가 날 수 있다고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에선 토종 플랫폼 기업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감독 당국의 감시 역량 대부분이 토종 플랫폼 기업을 향할 가능성이 높단 의미다. 이런 가운데 해외 플랫폼 기업이 토종 기업을 방패 삼아 적극적인 외연 확장 정책을 펼치면 이들 해외 기업의 영향력만 급증할 여지가 있다. 플랫폼 업계에서 플랫폼법을 두고 ‘제 살 깎기’라는 비판을 쏟아낸 이유다.

플랫폼 기업의 특성상 사전 규제의 효용이 적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전 규제는 시장의 참가자, 가격, 진출입을 사전에 통제하는 효과가 있어 혁신성과 변동성이 중요한 플랫폼 기업엔 부적절한 정책”이라며 “온라인 플랫폼 생태계는 시장 점유율 등 기준을 두고 규제 대상을 정하기엔 역동적이고 변동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보고서를 내고 “사전 지정제는 낙인 효과 등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며 “사전 지정제 등 강경 규제책 도입의 필요성과 시급성이 분명치 않은 상황인 만큼 플랫폼법의 효용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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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선 회의적 의견, “사후 추정 방식 효용 적어”

이에 결국 공정위가 플랫폼법 도입을 포기하겠단 입장을 공식화하자 업계에선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비합리적인 규제가 플랫폼 기업의 혁신을 저해하는 상황을 사전에 막아 냈단 것이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크다. 사후 추정 방식은 사전 지정제보다 제재의 신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다. 공정위가 사후 추정 방식에 따라 특정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플랫폼으로 판단하기 위해선 연 매출 4조원 이상, 단일 플랫폼 기준 시장 점유율 60% 이상 등 요건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시장 점유율 등 지표를 계산하는 데 통상 수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기재 소상공인연합회 온라인플랫폼공정화위원장은 “공정위가 업계 점유율을 계산하는 사이 중소 플랫폼과 입점 업체들의 피해는 빠르게 누적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정위가 새로 내놓은 규제 방안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단 점도 문제다. 공정위는 연 매출 4조원 미만의 플랫폼 기업에 대해선 독과점 규제를 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규제가 온전히 적용되기 위해선 정부가 기업의 매출 실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단 전제가 깔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정부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매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조세 회피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탓이다. 공정위는 “지배적 플랫폼을 구분하는 매출은 단순한 법인 매출뿐 아니라 국내에서 발생한 직간접적 매출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며 큰 문제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외국계 기업의 전체 매출 중 국내 매출만을 걸러낼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불명확하단 비판은 여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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