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등에 직무급제 도입 서두르는 정부 “업종별 임금 메타모델 구축 목표”
상생협약 체결 업종 새 직무급제 도입 시도 업종 공통 적용 가능한 임금체계 모델 구축 정책 일관성 확보·명확한 기준 마련은 과제로
고용노동부가 업종별 임금체계 개편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조선업과 자동차 관련 제조업, 석유 화학업 등 분야에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도입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정부가 민간 기업으로 직무급제 확대를 서두르면서 한동안 침체했던 노동 개혁의 움직임도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컨설팅 운영기관 선정해 업종 공통 쟁점 파악→메타모델 구축
15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노동부는 최근 업종별 임금체계 개편 컨설팅 사업을 운영할 기관을 모집하고 나섰다. 과거 노사발전재단에서 진행한 ‘일터 혁신’의 일환으로 기업의 신청이 있을 경우 개별적으로 임금체계 개편 컨설팅에 나선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번 컨설팅 운영기관 선정 후에는 조선업과 자동차 부품업, 석유화학업 분야의 중소·중견기업 20곳 이상에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컨설팅을 지원한다는 설명이다. 소수의 운영기관이 동일 업종에 대한 다수 기업에 컨설팅을 지원해 업종의 상황이나 공통 쟁점을 파악하는 데 용이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임금체계 개편을 통한 직무급제 도입은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노동 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연공이 높아질수록 임금도 따라 오르는 호봉제와 달리 직무급제는 개별 직원의 직무 및 성과에 따라 임금 수준을 다르게 산정하는 임금체계다. 정부는 그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직무급제 확산이 필수 조건이라는 주장을 여러 차례 펼쳐 왔다.
이같은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안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업종별 실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업 단위로 수행하던 과거의 컨설팅 형태는 전체 산업에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동일 분야에 있는 다수의 기업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을 구축해 새로운 임금체계의 업종별 확산을 돕겠다는 복안이다.
노동부가 이번 컨설팅 대상으로 지목한 조선업, 자동차 부품업, 석유화학업은 상생협약을 체결했거나, 체결을 논의 중인 업종이다. 지난해 3월 조선업계가 △원·하청 적정 기성금 지급 △숙련 중심 임금체계 개편 등의 내용을 담은 상생협약을 체결하자, 정부는 상생패키지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직무 중심 임금체계 개편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노동부는 전문가와 업종별 단체로 구성한 임금체계개선위원회를 꾸려 컨설팅 과정에서 포착되는 쟁점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 새로운 임금체계 모델을 구축할 예정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업종 전체의 임금지형을 그린 다음 해당 업종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메타모델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며 “이를 활용해 직접 컨설팅을 받지 않은 기업도 스스로 임금체계를 만들 수 있도록 매뉴얼과 교육과정을 현장에 배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대 노총 강력 반발에 번번이 무산
그간 새로운 임금체계를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청사진이 번번이 실패한 것은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2년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 방안을 마련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중소기업과 근로자에 대한 임금체계 구축 지원 △업종별 임금체계 개편 지원 △공정한 평가 및 보상 확산 지원 △60세 이상 계속 고용을 위한 임금체계 관련 제도 개편 모색 △포괄임금 오남용 방지 △상생임금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을 담은 임금체계 권고안을 내놓자, 양대 노총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한국노총은 성명을 내고 “이번 권고안이 양질의 일자리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며 정부와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노동시장 개혁안을 반박하고 나섰다. 특히 호봉제를 직무·성과급제로 전환하자는 개편 방향과 관련해서는 “사용자 단체가 제시해 온 임금 삭감 정책에 정부가 휘둘린 모양새”라고 강력 비판했다. 이어 “직무·성과급제의 효과성을 인정하는 연구는 생산직이나 영업직, 집단성과급제 등 상당히 제한적인 데다, 반대로 효과성을 비판하는 연구도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역시 “정부의 입맛에 맞춘,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임금체계 및 노동시간 개악 시나리오”라고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안을 평가하며 해당 권고안이 노동조합의 역할과 위상을 폄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봉제와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연공급이 불공정하다는 불만이 현장의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이는 연공급의 불공정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저임금의 굴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호봉제가 일정 규모 이상의 노조가 형성된 대기업 내 정규직 남성에게만 유리하다는 연구회의 의견에 정면 반박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에서는 대기업과 금융,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만 고임금 연공급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어서 지금의 고용과 임금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노동 개혁이 오랜 시간 표류한 배경에는 양대 노총의 극심한 반발이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직무급제 정착은 중장기적 과제, 신중한 접근 필요”
한동안 미뤄지던 직무급제 도입이 속도를 내면서 전문가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형식적인 논리보다는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임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이 선행되는 것은 물론 정책의 일관성이 확보돼야 직무급제의 정착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나아가 현재 산업 현장에서는 직무를 제대로 나누지 않고 직무에 대한 수당만 지급해도 직무급제를 도입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정부가 보다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현 체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현재 정부는 철학적인 고민은 건너뛴 채 직무급제를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너무 몰입된 경향이 있다”고 진단하면서 직무급제의 도입 배경은 잊고 단순히 요건만 맞추는 기업이 늘어날 수 있다는 데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이같은 직무급제 도입의 부작용에 대해 “직무급제가 실질적 작동 없이 임금 차등 지급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투입한 것에 비해 실효성은 별로 안 나올 수 있다”며 “정부가 밀어붙이면 기업 입장에서는 도입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게 과연 노사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임금의 경우 매달 지급되는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연 단위의 계약이 주를 이루는 탓에 산업 현장에 새로운 임금 체계가 적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은 특성은 2004년에 공무원 임금 개혁을 하고 2013년에야 그 성과를 확인한 일본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 소장은 “(직무급제 안착을 위해서는) 기존 임금 체계를 적용받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은퇴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임금 체계 개편은 근로자들의 이행 관리가 필수 과제이기 때문에 중장기적 과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