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병자’ 독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 대폭 하향 조정
독일경제연구소 등 5대 연구소, 반기 합동 보고서 발표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수출 부진, 성장 모멘텀 취약 단순한 경기 순환 차원 문제 아닌 구조적 문제란 지적도
독일의 5대 경제연구소가 올해 독일의 성장률 전망치를 대폭 하향 조정했다. 최대 우려 요인으로는 수출 부진이 거론된다.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빅 이벤트’ 이후 세계 경제는 대체로 회복세를 보였지만, 독일만은 예외였다. 주요 수출 품목인 자본재·중간재 수요가 여전히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주력인 에너지 집약 산업 역시 전기·가스 요금 상승으로 경쟁력을 상실했고,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소비 심리마저 짓눌려 있다.
올해 독일 성장률 전망치 1.2→0.1%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 등에 따르면 독일경제연구소(DIW), Ifo경제연구소, 할레경제연구소(IWH), 키엘세계경제연구소(IfW), 라이프니츠경제연구소(RWI) 등 5대 연구기관은 27일(현지시간) 발표한 독일 경제에 관한 반기 합동 진단 보고서에서 올해 독일의 성장률 전망치를 0.1%로 제시했다. 6개월 전 예측치인 1.2%에서 1%포인트 넘게 하향 조정한 결과다.
이는 지난달 독일 정부가 제시한 0.2%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치다. 정부 전망치 역시 작년 10월 1.3%에서 큰 폭으로 꺾였다. 앞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0.3%, 도이체방크는 –0.2% 등을 제시한 바 있다. 5대 연구소의 이번 반기 보고서에는 ‘독일 경제가 병들고 있다-부채 브레이크(재정 준칙) 개혁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연구소들은 “독일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까지 지속된 경제 약세 국면은 성장 동력 후퇴를 동반하고 있으며, 전반적 둔화 흐름에는 경기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이 중첩돼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올봄부터 상황이 서서히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만, 반등세는 강하지 않을 것이라 우려했다. 1분기 이후 기술적 불황(2개 분기 연속 GDP 감소)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도 유사한 관측을 내놓은 바 있다. 다만 내년에는 1.4% 성장세를 되찾을 수 있을 거란 전망이다. 이는 6개월 전 전망치(1.5%)와 큰 차이가 없다. 국가 간 교역이 다시 활성화하면서 성장 기회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다. 인플레이션 둔화에 따른 수요 회복은 또다른 관건이다. 연구소들은 지난해 5.9%까지 치솟은 독일의 물가 상승률이 올해 2.3%, 내년 1.8%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임금 상승률도 올해 4.6%, 내년 3.4%로 강하게 유지되며 소비를 자극하는 요인이 될 거란 분석이다. 이른 시일 내 기준금리와 단기 대출 금리가 인하될 것이며, 이에 따라 주택 시장이 되살아날 것이란 예측도 함께 제시했다. 최근 독일 정부는 팬데믹 기간 무력화했던 부채 브레이크(재정 준칙)를 되살리는 등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다. 이와 관련해 5대 연구소는 독일의 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지난해 2.1%에서 올해 1.6%, 내년 1.2%까지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GDP -0.3%, 3년 만에 또 역성장
지난해 독일은 주요 경제 대국 중 최악의 성적을 냈다. 연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0.3%를 기록하며 역성장한 것이다. 분기별로 보면 1분기 0.1%로 소폭 성장한 뒤 2~3분기 0%에서 정체하다 4분기 –0.3%로 꺾였다.
독일 경제는 2022년 4분기 -0.4%, 지난해 1분기 -0.1%로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이미 기술적 경기침체에 진입했었다. 특히 독일 경제는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 비중이 큰 특성상 고금리와 에너지 가격 급등 등 최근 세계 경제 여건의 타격을 주변국보다 더 크게 받고 있다.
화학 업종의 경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비해 생산량이 약 20%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실만으로도 독일 전체 경제성장률이 0.3%포인트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한편 독일의 연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집계되기는 이번이 9번째다. 독일 경제는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2002∼2003년 각각 -0.2%, -0.7%로 2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한 적이 있다.
독일이 유럽의 병자로 불리는 이유
독일 경제 부진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에너지 가격 인상과 수출 부진이 지목된다. 러우 전쟁으로 러시아의 값싼 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독일 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소비자의 지출이 위축된 것이다. 최대 수출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경제가 부진한 데다, 중국이 서비스업 비중을 높이는 내수 시장 강화 정책으로 독일 제조업의 수출품 수요도 대폭 줄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독일 경제의 올해 부진은 단순한 경기 순환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최근의 독일 경제 부진은 그런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 즉 사업 모델과 경제 모델이 한계에 봉착한 결과라는 진단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한계를 타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독일 경제의 강점이던 제조업 중심 모델이 수명이 다했음에도 이를 타개할 독일의 혁신을 뒷받침할 인프라나 사회적 장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페테르 보핑게르 독일 부르츠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교수는 유럽의 진보적인 평론지 ‘소셜 유럽’에 ‘독일의 진정한 경제적 질환’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수출 중심, 제조업 중심, 자동차 산업이라는 3개 축으로 가동되는 독일 경제 모델이 수명이 다했는데, 이를 타개할 사회적 장치가 없다고 우려했다. 보핑게르 교수에 따르면, 독일 국내총생산의 47% 비중을 갖는 수출은 급속한 글로벌리제이션 환경 하에서는 독일 경제의 활황을 이끌었으나, 지금처럼 글로벌리제이션이 퇴조하고 미국이 선도하는 보호주의 조류에서는 더 이상 성장 엔진이 아니다.
독일 경제의 중추인 제조업은 전체 산업에서 부가가치 비중이 19%로, 미국의 11% 등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다. 이런 강력한 제조업은 수십년 동안 성장의 견인차였으나, 최근 높은 에너지 가격과 탈탄소화 경제 수요는 서비스업 중심의 국가에 비해 그 부담을 높이고 있다. 특히 독일에 있어 디지털 플랫폼의 결여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따르면 미국은 디지털 플랫폼 글로벌 시장에서 약 80%, 중국은 1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유럽은 고작 2%에 불과하다.
더욱이 독일 제조업의 상징인 자동차 분야는 최근 중국 시장 의존이 심했다. 업계에 따르면 독일의 자동차 생산은 2017년 정점을 치고는, 현재는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전 세계적으로 전기자동차의 보급, 특히 중국에서 전기자동차 생산과 판매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폭스바겐 등 독일 자동차 회사들이 내연기관에 너무 오랫동안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서비스 중요성을 평가절하해 온 결과다.
이에 전문가들은 혁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규제완화와 세금 삭감 등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구축을 위한 마중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제조업을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만큼, 부채를 발생해서라도 공공투자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