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사이버렉카’, 지나친 사적 제재·무고한 시민 신상공개 등 부작용 속출

160X600_GIAI_AIDSNote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에 가해자 신상공개 흐름 확산, 무고한 시민 피해 입기도
우후죽순 쏟아진 사적 제재 사이버렉카, 사회적 이슈화에 규제 목소리↑
사이버렉카의 생명줄은 분노한 국민, 문제 해결 위해선 '국민의식 개선' 선행돼야
criminal vigilantism PE 20240625

20년 전 발생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일부가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허위사실로 신상을 공개한 유튜버 등을 처벌해 달라는 집단 진정서를 제출했다. 소위 ‘사이버렉카’를 중심으로 한 가해자 신상 공개가 사적 제재의 과오를 다시금 반복한 결과다.

“사건과 관련 없는데 신상 공개, 유튜버 처벌해 달라”

25일 경남경찰청과 밀양경찰서 등에 따르면 최근 온라인에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A씨 등 9명은 지난 23일 밀양경찰서를 찾아 이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도 사진 삭제 요청 민원을 냈다. 이들은 “사건과 일절 관련이 없는데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들의 사진 등 신상 공개가 되면서 여러 곳에서 협박을 당하고 있다”며 피해를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외에도 온라인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광범위하게 확산하면서 이에 따른 고소·진정도 증가하고 있다. 경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따르면 지난 23일까지 밀양 성폭행 사건과 관련한 고소·진정 건수는 110여 건에 이른다. 이들은 가해자의 여자친구라는 내용으로 잘못 공개됐거나 유튜브 채널이 당사자 동의 없이 무단으로 개인 신상을 공개해 명예가 훼손됐다는 취지로 고소·진정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적 관심 모인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사적 제재’ 횡행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 건 최근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사건에 다시금 불씨가 붙기 시작한 건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가 ‘밀양 성폭행 사건 주동자 ○○○, 넌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봐?’라는 제목의 영상을 게재하면서부터다. 해당 영상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주동자들을 규탄하는 내용과 가해자의 직접적인 신상이 담겨 있었다.

영상이 확산하면서 사건에 대한 관심이 결집되기 시작했고,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공분했다. 사건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단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은 2004년 경남 밀양에서 44명의 남학생이 1년간 여중생 1명을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성폭행에 직접 가담한 일부를 기소했고, 나머지는 소년부에 송치하거나 풀어줬다. 기소된 10명 역시 이듬해 소년부로 송치됐지만 보호관찰 처분 등을 받는 데 그쳤다. 44명 중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아 전과기록이 남은 건 단 한 명도 없었던 셈이다.

나락보관소는 이후로도 꾸준히 사건 당사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사태가 커지자 나락보관소를 벤치마킹해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유튜브 채널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 역시 늘어갔다. 심지어 일각에선 사이버렉카로 불리는 유튜버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현실과 맞지 않는 법을 제정하는 국회, 국민 정서에 어긋나는 판결을 거듭하는 법원, 비상식적인 수사를 이어가는 검·경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탓에 비질란테(Vigilante·자경단)에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이들이 늘어난 것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이들의 행태가 법의 테투리 바깥에 있었단 점이다. 앞서 유튜버 나락보관소는 피해자의 가족과 메일을 통해 가해자 44명의 신상을 공개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단 내용의 커뮤니티 글을 작성한 바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나락보관소는 피해자 측과 단 한 번도 의사소통을 진행한 적이 없었다. 결국 조회수와 수익을 위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 사이버렉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narak youtube 20240625
유튜버 ‘나락보관소’가 게재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가해자 신상 폭로 영상에 달린 후원 댓글 일부/사진=나락보관소 유튜브 화면 캡처

사이버렉카 규제 목소리↑, ‘자정작용’ 필요하단 목소리도

이 같은 사례가 거듭 반복되다 보니 사이버렉카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최근에는 사이버렉카가 횡행하는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한다는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0%p)가 공개되기도 했다. 한국언론재단이 20~50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14~18일 사이버렉카들이 제작한 유명인(연예인·스포츠선수·정치인 등) 관련 콘텐츠 이용 경험 등을 물어본 결과, 유명인들이 온라인상에서 자신에 관한 허위사실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그로 인한 비난이 시달리다가 숨지는 문제와 관련해 ‘사이버렉카들의 근거 없는 의혹 제기'(93.2%)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답이 나왔다. 응답자의 대다수(92%)가 ‘사이버렉카가 사회적 문제’라고 답하기도 했다.

시민사회에선 유튜브 측의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단 목소리도 쏟아졌다. 현재 유튜브는 90일 내로 세 차례 경고를 받을 시 채널을 영구삭제 하는 ‘삼진아웃’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사이버렉카를 처단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 셈이지만, 조회수와 댓글수를 기준으로 수익 창출이 이뤄지는 유튜브의 수익구조 특성상 삼진아웃만으로 사이버렉카를 완전히 근절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한 명의 사이버렉카가 사라지면 다른 두 명의 사이버렉카가 나오는 실정이니 말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선을 넘어 인격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을 혐오하거나 가짜뉴스를 의도적으로 유통하는 경우 규제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튜브가 ‘방관’을 멈추고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단 취지다.

다만 일각에선 “규제 및 제도 개선만으로 사이버렉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의문”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애초 사이버렉카의 생명줄을 국민들이 잡고 있는 이상 사이버렉카는 하나의 마리오네트일 뿐, 시민의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유튜버가 영향력을 잃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혐오와 분노는 재차 표출될 수밖에 없단 것이다.

실제로 이미 ‘디지털 교도소’라는 선례도 있다. 디지털 교도소는 범죄자 신상 공개를 명분으로 한국 국민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유포한 사이트다. 디지털 교도소는 이번 사이버렉카 유튜버들과 마찬가지로 사법 불신이 팽배한 이들 사이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실상은 마약사범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이들의 신상을 퍼뜨리기 위한 공간이었다. 범죄 카르텔의 일부였을 뿐이란 소리다.

이처럼 ‘소비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사이버 비질란테와 가짜뉴스 등의 행태는 언제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시민사회 차원에서 자정작용을 이뤄야 한단 이야기다. 법을 현실에 맞춰 개정하고 상식적인 판결을 내리는 건 정계와 법조계의 과제겠지만, 사법 불신만을 앞세워 혐오를 정당화하지 말아야 함은 성숙한 국민들의 과제다. 사이버 비질란테가 뿌린 혐오의 씨앗이 피해자의 눈물을 양분으로 발아한단 사실을 사회 스스로 깨우칠 필요가 있단 의미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