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에 드리운 ‘트럼프 그림자’, 정상회의서 우크라이나 지원 강화 총력전
나토 정상들 "우크라의 미래 나토에 있다, 무기 지원 약속"
獨에 우크라 군사 지원 조율 본부 설치, 3성 장군 지휘키로
유럽극우 약진·우크라 지지기반 약화에 발걸음 빨라진 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러시아의 기습 침공에 맞서 3년째 고군분투 중인 우크라이나에 60조원을 지원하기로 뜻을 모으며 흔들리지 않는 연대를 약속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할 경우 우크라이나 지원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 군사 지원 주도권을 미국에서 나토로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은 우크라이나 방공망 강화를 약속하며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지만, 유럽 회원국들의 ‘트럼프 귀환 우려’는 불식시키지 못한 모습이다.
나토 정상, 우크라에 ‘400억 유로 지원’ 공동성명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은 이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나토에 있다(Ukraine’s future is in NATO)”며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 자격을 포함한 유럽·대서양과의 완전한 통합을 향한 불가역적인 길(irreversible path)을 걷는 것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 조건인 민주·경제·안보 개혁을 이행해 가고 있다고 평가해 이 노력을 계속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맹국들이 동의하고 조건이 충족되면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을 초청할 수 있는 입장이 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다만 우크라이나가 원했던 나토 가입 시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노력을 되돌릴 수 없다고 밝히면서도 시점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와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가입이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날 나토 정상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격퇴하고 앞으로도 억제할 수 있는 전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안보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내년 최소 400억 유로(약 60조원) 상당을 지원하고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승리에 필요한 지속 가능한 수준의 안보 지원 등 메커니즘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나토는 또 회원국들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군사 장비와 훈련을 조율하는 본부 역할을 할 ‘나토의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및 훈련 담당기구(NATO Security Assistance and Training for Ukraine, NSATU)’를 독일에 두고, 3성 장군이 지휘하도록 하기로 했다. NSATU는 32개국 700여 명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합군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2022년 2월부터 진행됐던 임무를 인계받을 전망이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와 나토의 상호 운용성 강화를 위해 ‘나토-우크라이나 합동 분석·훈련·교육센터(JATEC)’를 설립하기로 했으며, 우크라이나 고위당국자들과 소통을 담당할 나토 고위 대표를 키이우에 파견하기로 했다.
트럼프 돌아오면 우크라 지원 백지장, ‘트럼프 2.0 시대’ 대비 포석
나토가 이처럼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동맹국에 준하는 군사 지원을 직접 챙기는 데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을 고려한 측면이 크다. 미국이 주도해 온 우크라이나 지원 노력을 유럽 동맹국들이 더 부담하도록 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지원과 나토 활동에 부정적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일부 유럽 국가들은 워싱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측과 직접 접촉에 나서며 줄을 대기 위한 물밑 작업에도 속도를 내는 등 트럼프의 귀환 가능성을 두고 현재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간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추가 군사 지원에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 왔고, 과거에는 유럽 나토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주장하며 방위비 증액을 압박한 데 이어 미국의 나토 탈퇴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동맹국들과 불협화음을 낸 바 있다. 이 같은 우려 때문에 나토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번 정상회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거론될 정도였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2기에 대한 망령이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 긴급성을 부여했다고 촌평했고,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귀환 가능성으로 인해 나토 정상들이 동맹을 확고히 하려고 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손상시키지 못하도록 ‘트럼프 방어(Trump-proof)’ 동맹에 쐐기를 박기 위해 노력한다는 분석이다.
나토의 이런 움직임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포착됐다. 지난 4월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나토 사무총장은 5년 동안 1,000억 유로(약 149조원)의 우크라이나 지원 기금을 확보하는 방안과 함께 그동안 미국이 조정 역할을 하던 ‘우크라이나 방위 계약 그룹(람슈타인 그룹)’을 나토 내부로 옮겨 나토가 무기 지원 업무를 조정할 것을 제안했다. 나토 회원국 등 50여 개국이 참여하는 이 그룹은 그동안 미국 주도로 매월 모임을 갖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를 조율해 왔다.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관련해 나토가 직접 관여하는 방안은 미국 국내 정치 및 세계 안보 지형 변동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원이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한 조처다. 미 정부는 지난해 600억 달러(약 82조원)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안을 마련했으나, 미 공화당이 이주민 대책 강화를 요구하며 의회 승인을 미루고 있는 데다 트럼프 리스크까지 겹쳐있는 상황이다.
나토가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할 시 나타날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비한 포석으로 분석된다. 나토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동맹국들이 러시아나 중국 등 중요한 대외적 문제에 있어 한목소리를 낼 경우 미국 대통령이 관련 약속과 파트너십에서 이탈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등 최근 주요 동맹국 정상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면서 이러한 움직임마저도 불안정한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말 TV토론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 지속 후보 사퇴 압박을 받으며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고 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조기 총선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음에도 끝내 패배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속한 사회민주당(SPD) 등 연립정부 파트너 정당도 지난달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에 참패하는 등 입지를 크게 잃은 상태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 시나리오, 한국 피해도 불가피
이런 가운데 나토 정상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충돌이다. 나토 헌장 5조에 규정된 집단방위 조항으로 인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경우 서방 동맹국들이 자동으로 참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서방 진영과 러시아 간 정면충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나토가 우크라이나의 회원가입을 극구 불허하고 있는 이유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는 시나리오도 나토 정상들의 우려를 고조시키고 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경우 북한과 중국, 이란 등이 무력 사용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가능하게 한 데 있어 중국뿐 아니라 북한과 이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역시 서방 진영은 물론 전 세계 안보에도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러시아의 승전은 나토 전체 회원국 본토를 공격당할 수도 있는 재앙적 시나리오란 경고도 나온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이후) 폴란드를 시작으로 나토로 눈을 돌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전혀 억지스러운 예측이 아니며 불가피한 결과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독일 국방부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부진한 틈을 타 러시아가 대규모 공세를 펼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뒤 10년 이내에 나토 회원국들과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울러 러-중 양국이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간 서방 세계가 부과한 징벌적 제재 조치 영향을 최대한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또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러시아의 행동 방식을 토대로 양안 관계 갈등을 겪고 있는 대만을 향해 이와 유사한 시도를 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도 대내외적 위기를 피해 갈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승리로 끝날 경우 한국의 외교적 자율성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앞서도 한국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함께 대러 경제 제재 수위를 높이자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면서 한러 관계가 급격히 냉각된 바 있다. 지난 2022년 10월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이 한·러 관계를 파괴할 것이라 엄포를 놨고, 지난달에도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방침을 재검토하자 “한국이 우크라이나 분쟁 지역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이에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비핵화와 통일이라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관국임을 고려할 때 결코 가볍게 흘릴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게다가 수출 중심국인 우리나라는 특히 러시아와 중국이 동맹을 강화할 경우 무역수지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은 전랑외교와 같은 보복 조치를 통해 한국 경제를 훼손한 전력이 수도 없이 많다. 푸틴과 시진핑 두 정상 모두 전 세계가 에너지와 제조업 분야에서 자국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