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러시아 본토 진격은 승전 계획 첫 단추”, 종전 물밑 작업 본격화
우크라군 3만 명, 러 쿠르스크에 재배치
러시아도 우크라 동부 전선 공세 강화
젤렌스키 "미국에 '종전 청사진' 제출 계획"
우크라이나-러시아 양국이 무력 공방을 벌이면서도 종전을 염두에 두고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물밑작업이 한창이다. 우크라이나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종전안을 조만간 미국에 전달할 방침을 알린 가운데, 전문가들은 11월 미국 대선을 전후로 종전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 막판 ‘영토 점령’ 경쟁
28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정치 전문 매체 더힐에 따르면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러시아군이 이날 병력 3만 명을 러시아 본토 쿠르스크 방면에 재배치했다고 밝혔다. 전날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2024 독립 포럼’에서 연사로 나선 시르스키 총사령관은 “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 쿠르스크주 수드자 지역을 포함한 여러 지역의 마을 100여 개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하고 있는 면적은 1,294㎢ 규모며, 쿠르스크에 진격하는 과정에서 생포한 러시아 군인은 594명이다.
우크라이나는 무기와 장비들도 공개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앞서 지난 24일 드론과 미사일을 결합한 형태의 신형 무기 ‘팔랴니치아(Palianytsia)’를 공개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독립 포럼 행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크라이나가 최초의 자국 탄도미사일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전했다. 이어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조차 확전 가능성을 우려해 지원하기를 망설였던 F-16 전투기가 드디어 전쟁에 투입됐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서 진격을 이어가고 있다. BBC방송 등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동부 요새인 토레츠크 인근까지 진군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의 병참기지로 평가받는 포크로우스크까지 노리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매일 50건 이상의 교전이 포크로우스크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공중 폭격과 공방도 치열하다. 러시아는 지난 26일 밤 우크라이나 전역의 에너지 기반 시설을 겨냥해 200발 이상의 미사일·드론을 발사한 데 이어 27일에도 100발에 달하는 미사일과 드론을 키이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역에 쐈다. 이에 우크라이나 공군은 러시아에서 장거리 전략 폭격기 여러 대가 이륙했다면서 전국에 공습경보를 발령하기도 했다.
종전 협상서 우위 점하기 위한 전략
양국이 이처럼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는 이유는 다가오는 종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정치매체 폴리티코 유럽판 등 외신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점령한 여러 마을들을 향후 협상 카드로 활용할 방침이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미국 등 서방이 종전 논의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국제법상 불법으로 편입했는데, 당시와 마찬가지로 전투는 멈추되 점령한 영토는 유지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나 유럽연합(EU)과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협상도 진행될 수 있는데, 우크라이나에서 차지한 땅이 넓을수록 입김이 세진다.
다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우크라이나다.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그대로 러시아에 넘겨줄 수도 있어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여러 차례 자신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전쟁을 즉시 끝내겠다고 공언해 왔다. 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고, 더 이상의 전투를 중지하도록 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내는 방법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제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내달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할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도 만나 종전안을 설명할 방침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향해서도 대화하자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오는 11월 ‘제2차 평화정상회의’ 개최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때 러시아를 초청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직접 물밑작업에 나섰다. 그는 지난 23일 키이우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인도 언론들과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사우스 국가 가운데 한 군데서 평화정상회의가 열릴 수 있길 희망한다”며 “모디 총리에게 인도를 개최 국가로 제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 “한국과 유사한 비무장지대 설치 방안 들어갈 것”
2년 6개월에 접어든 러-우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과거 한국전쟁과 유사한 방식으로 협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선 시 굴욕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굉장히 컸을 것”이라며 “따라서 미국 대선 전까지 단기간에 가시적인 전투 성과를 내서 미국과 서방의 관심과 주목을 다시 얻고 러시아에 대해서도 협상의 카드를 확보하는 그런 전과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다만 쿠르스크에서 버티려면 추가 자원이 투입돼야 하는 만큼 우크라이나가 전과를 확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봤다.
제성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학과 교수는 “만약 쿠르스크에서 우크라이나가 1~2주 내에 철수하게 되면 향후 최정예 부대를 상실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어렵사리 지켜온 동부전선이 이르면 9월경에라도 무너질 수 있다”며 “반대로 이 지역을 우크라이나가 성공적으로 지켜낸다면 향후 협상에서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 맞교환의 기회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길주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성공하면서 이전까지 굳혀져 가던 우크라이나 영토의 5분의 1을 러시아에 내줘야 한다는 협상 조건에 제동을 걸 동력도 확보했다”며 “이를 통해 푸틴이 가졌던 전쟁 성과의 목표치를 낮추고 추후 협상에 대비하는 차원의 카드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과거 한국전쟁 당시 2년 이상 정전협상을 진행했는데 우크라이나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전쟁에선 유엔사와 북한 대표가 정전협정 맺었지만 우크라이나는 다국적군과 중립국감독위원회 등을 구성해서 종전 체제를 관리하고 협정 위반 여부 등을 감시하게 될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엄구호 한양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러시아 본토 공격 이후 전황은 영토를 둘러싼 심각한 대응을 주고받으면서 강도가 한층 높아질 것”이라 전망하며 “무엇보다 다가올 미국 대선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향후 3개월 동안 마치 과거 한국전쟁 당시 정전협정을 앞두고 고지전을 벌였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과 영토 점령을 위해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어 “트럼프가 재선에 승리하거나 전황이 러시아가 유리하게 전개되는 시점에 평화협상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며 “협상안에는 아마도 우리나라와 유사한 비무장지대 설치 방안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