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정년퇴직 본격화, ‘일하고 싶은’ 노인과 ‘자르고 싶은’ 기업
쏟아지는 베이비부머 세대 정년퇴직자들, 주요 기업 노조 ‘정년 연장’ 외치고 나서 난색 표하는 국내 기업들, 근본적인 원인은 연공서열제·인건비 부담 정년 연장·폐지로 인력 공백 메꾸는 선진국들, 우리나라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베이비부머 세대(1955~1974년생)의 퇴직이 본격화하며 정년 연장 및 노인 재취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추세다. 특히 조선·철강·자동차·전자 등 제조업 분야 주요 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커졌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정년퇴직이 가속화할수록 인력 부족 문제는 심화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주축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빈자리를 채울 청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2차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한 이후 200만 개에 달하는 일자리가 남게 될 것이라는 전망마저 제기된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고충은 아니다. 세계 각국은 정년을 연장하거나, 아예 ‘정년’이라는 개념을 없애는 등 노인 인력 활용을 위해 힘쓰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 등을 이유로 정년 연장에 부정적인 뜻을 내비치고 있지만, 결국 관련 논의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노조의 ‘정년 연장’ 요구
HD현대중공업, HD현대건설기계 등 5개 HD현대그룹 계열사 노동조합은 지난달 정년 연장 요구안을 그룹에 전달했다.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사측에 정년을 지금보다 1년 연장(61세)해달라고 요구했으며, 한화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이후에도 꾸준히 정년 연장을 외치고 있다. 철강 업계에선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 포스코노조가 정년 연장 및 임금피크제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업계의 정년 연장 요구가 폭증한 것은 우리나라 인구 구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퇴직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정년퇴직 연령에 도달한 1963년생이나 1964년생은 만 63세 이전에는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없다. 60세 정년 후부터 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 단절이 발생하는 셈이다. 최근 들어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층 커진 이유다.
기대수명 연장으로 퇴직 이후 근로를 희망하는 노년층이 증가했다는 점도 ‘정년 연장’ 요구에 힘을 실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중 고령층(55~79세) 부가 조사에 따르면, 고령자 중 장래 근로를 희망하는 사람 비중은 2013년 60.1%에서 지난해 68.5%로 늘었다. 같은 기간 근로를 희망하는 연령도 71.5세에서 72.9세로 한층 높아졌다.
인건비 부담에 고개 내젓는 기업들
하지만 기업들은 정년 연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비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19년을 기준으로 정년을 5년 연장하면 기업의 추가 고용 비용이 15조9,000억원(국민연금 등 간접비용 포함)에 달할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후 임금 상승이 이어진 만큼 정년 연장에 따른 비용 규모도 조사 당시 대비 커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은 연공서열식 인사 체계로 인해 정년 연장의 부담이 큰 편이다. 장기 근속한 직원에게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는 임금 체계에서 노년층의 퇴직이 미뤄질 경우, 비교적 인건비 지출이 적은 신규 인력을 채용할 수 없게 되어 부담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고위직 임원도 정년퇴직 연령에 가까워지면 내치는 것이 우리나라 고용 시장의 현주소다. 임금 체계의 한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사실상 고용 연장을 논의하기가 어려운 셈이다.
중장년 인력 관리 문제도 기업에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제 2021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300개 대·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10개 기업 중 9곳이 ‘중장년 인력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했다. 기업이 지목한 어려움은 ‘신규 채용 부담'(26.1%)과 ‘저성과자 증가'(24.3%) 등이었으며, 응답 기업 중 71.7%가 정년 65세 연장에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인력 부족’ 위험 코앞에, 정년 연장 필요성 커져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직으로 인한 인력 부족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지난 2007년 베이비부머 세대로 불리는 ‘단카이(團塊) 세대’의 대규모 은퇴로 인한 인력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단카이 세대의 정년퇴직이 본격화한 가운데, 일자리를 물려받을 청년 수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60세였던 법적 정년을 65세로 연장하고, 근로자가 원할 경우 70세까지 근로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비슷한 수순을 밟고 있다. 노동시장의 주축인 제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8년~1974년생) 인구가 약 635만 명에 달하는 반면, 예비 경제활동인구(2005년~2013년생)로 불리는 청년들은 고작 418만 명에 그친다. 2차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하는 2030년대 초에 약 200만 개의 일자리가 남게 되는 셈이다. 사회적으로 정년 연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 대부분의 선진국은 정년을 연장해 인력을 확보하는 방법을 택했다. 1978년 70세로 정년을 연장한 미국은 1986년 ‘정년’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앴다. 영국도 2011년 연령 차별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정년을 폐지했다. 독일은 정년을 65세에서 67세로, 프랑스는 62세에서 64세로 각각 연장할 예정이다. 지난해 2,000여만 명의 정년퇴직을 시작으로 2차 베이비붐 세대 은퇴기가 시작된 중국도 정년을 65세로 연장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력 공백’의 공포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정년 연장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라는 ‘시한폭탄’의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차후 정부와 산업계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쏟아져나오는 노인 인력을 활용하고, 세대 갈등·노사 갈등을 최소화하며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적극 모색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