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없는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 규제 악순환 고리 끊을까

제도가 기술 따라가지 못해 발생하는 규제 지체 극복 위해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 규제샌드박스 도입, 860건 규제특례 적용 받았으나 현장 규제 장벽에 실패하기도 이해관계자와의 가치 충돌과 공무원 관료주의 타파해야 혁신 날개 펼친다

160X600_GIAI_AIDSNote
이영 중기부 장관이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방안 간담회’에 참석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륜 UL코리아 대표, 배경은 사노피 코리아 대표 겸 주한유럽상공회의소 헬스케어 위원장, 김후곤 변호사, 이영 중기부 장관, 윤동섭 연세의료원장, 김무환 포스텍 총장, 성상엽 벤처기업협회장, 구태언 변호사/사진=중소벤처기업부

국내 최초로 네거티브 규제를 시행하고 실증부터 사업화까지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용하는 혁신 특구가 조성된다. 아울러 전면적 네거티브 규제 시행을 통해 국경과 공간을 초월하는 실증환경도 구축한다. 정부는 혁신 특구를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도전을 위한 기회의 장으로 육성함으로써 글로벌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계획이다.

전면적 네거티브 규제 시행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는 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제233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 방안’을 발표했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 시 ‘한·미 클러스터 라운드 테이블’ 등을 계기로 미국 혁신기관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등 협력 기반을 마련한 바 있다. 글로벌 혁신 특구는 제도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발생하는 규제 지체를 극복하고 혁신 스타트업의 신기술 개발을 촉진한다는 대의명분하에 마련됐다. 이는 최근 이어지고 있는 수출 부진과 원화 약세,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으로 인한 미국발 은행 위기 등 3중고의 대외여건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혁신’뿐이며, 이를 위한 고강도 규제 타파가 선행돼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글로벌 혁신특구의 가장 큰 특징은 ‘네거티브’ 규제다. 글로벌 혁신특구에서는 신제품의 기준, 규격 등이 없거나 현행 법령의 적용이 부적합해도 실증이 허용된다. 중기부는 글로벌 혁신특구가 지정되는 대로 네거티브 목록을 작성하고 규제 소관 부처가 제시하는 추가적 유예 조치를 반영할 방침이다. 이 밖에도 △제품 기획 단계부터 수출 맞춤형 해외 인증지원 △신속한 사업화를 위한 안전성 즉시 인증 제도 △신산업 전용 보험 등 스타트업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 마련에도 나선다.

이영 장관은 “더 이상 규제로 인해 혁신이 지체되지 않도록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며 “글로벌 혁신특구를 통해 글로벌 기준과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규제는 과감하게 혁신하고, 우리 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경쟁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바꿔 미래세대를 위한 기회의 플랫폼을 공고히 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규제샌드박스, 양적 성과 이뤄냈지만 질적 성과는 ‘미흡’

일각에서는 이번 정책의 성공 여부는 관련 부처와 얼마만큼 협력하느냐에 따라 양분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례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ICT 규제샌드박스를 이용하고 있는 ‘쓰리알코리아’의 경우 규제샌드박스 신청 후 승인까지 3년이나 소요됐다. 보건복지부의 유권해석 등으로 인해 사업 초기부터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이 규제샌드박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하에 마련됐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규제혁신 3종 세트 적용 절차/출처=중소벤처기업부

규제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란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래놀이터처럼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 신기술·신사업 시도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일종의 실험장이다. 2016년 영국 정부가 금융 분야에 최초로 도입한 규제샌드박스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60여 개국에서 운영 중이다. 규제샌드박스 도입 이후 그간 총 860건의 과제가 규제 특례를 적용받아 나름의 양적 성과를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규제특례를 통해 2022년 기준 10조5,000억원 이상의 투자유치, 4,000억원 이상의 매출 증가, 1만1,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는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일례로 세종시 규제자유특구는 ‘자율주행차 운수사업자 한정면허 부여’ 등 실증특례 7건의 규제샌드박스와 도로법에 관한 특례 등 3건의 메뉴판식 규제특례를 적용받았고, 규제샌드박스 4법 중 마지막으로 출범된 지역특구법에 따라 규제자유특구로 선정된 부산도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 해양물류 플랫폼 서비스에 대한 실증특례를 적용받았다. LG전자의 상업용 이산화탄소 세탁기도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사례다. 해당 세탁기는 물과 기름을 넣어 드라이클리닝을 하는 기존의 상업용 세탁기와 달리 이산화탄소를 냉각·압축해 세탁하는 방식으로, 종전 이산화탄소 압축 등이 고압가스법상 ‘고압가스 제조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실증이 불가능했으나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사업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질적 성과에 기반한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실상 실증특례를 법으로 허용된 것 외엔 모두 금지하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결국 현장 규제의 장벽을 넘지 못해 사업화에 실패한 사례도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2년 이상 실증을 추진한 119개 실증특례 중 13.4%만이 임시허가를 따는 데 그쳤다. 이뿐만 아니라 사업 중단과 같은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꺼리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사진=타다

혁신 짓밟는 주요인: 기득권자의 압박에 기인한 규제와 몸사리는 공무원의 타성

급속한 기술 발전이 이뤄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존 규제 체계는 신기술의 빠른 변화를 신속하게 반영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규제 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했지만 공간적, 시간적 제한 등 부가 조건을 엄격하게 규제한 탓에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해관계나 가치 충돌로 인해 적극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제약도 존재했다. 실제로 해당 사업의 이해관계자 및 기득권자의 반대에 부딪혀 규제샌드박스의 문턱 자체를 넘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결국 이러한 갈등의 악순환은 규제샌드박스 체계를 무력화시킴은 물론, 나아가 글로벌 시장으로 도약할 혁신의 날개를 꺾는 길이다.

기득권자와 혁신 기업과의 갈등은 타다, 로톡 외에도 많다. 부동산 거래앱 ‘직방’과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세금 환급앱 ‘삼쩜삼’과 한국세무사회, 성형 정보앱 ‘강남언니’와 대한의사협회 등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직방과 같은 프롭테크 기업의 혁신을 가로막는 법안이 발의돼 논란이 일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소속 변호사들의 ‘로톡’ 등 법률 플랫폼 가입을 금지한 것처럼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역시 회원들의 플랫폼 거래를 막겠다는 취지다. 지난 2020년 3월 여야는 택시 업계의 압력에 밀려 타다금지법을 통과시켰으나, 이는 결국 ‘택시요금 인상’과 ‘택시대란’으로 돌아왔다. 이미 혼쭐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공정 경쟁 저해’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혁신의 발목을 붙잡는 사이 국내 자본과 인재는 해외로 나가고 있다. 자율주행 택배 서비스를 개발한 서울대 연구팀은 규제 탓에 미국 실리콘밸리로 사업 무대를 옮겼고, 현대차와 네이버 등 국내 대기업은 동남아시아의 차량 호출 서비스 ‘그랩’에 수천억원씩 투자하고 있다.

혁신 기술의 사업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관계 부처의 전문성 부족 및 부처 간 협의 지연도 거론된다. 실제로 바이오 분야의 경우 산업부에서 실증특례를 했으나 복지부와의 후속 협의로 인해 사업 개시 결정이 지연되기도 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동일 시기에 유사한 서비스를 출시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한국무역협회가 국내 스타트업 256개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25.4%, 즉 4곳 중 1곳이 규제를 피해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기할 만한 점은 통상 해외 스타트업의 경우 주로 겪는 애로사항으로 자금 부족 또는 전문인력 부족을 꼽는 반면, 한국은 ‘기업 규제’를 주된 애로사항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설문에 응한 스타트업은 특히 ‘기술실증 관련 과도한 허가기준’과 ‘등록 및 허가업종의 복잡한 진입 장벽’ 등을 가장 힘든 규제로 꼽았다. 이는 단순히 법 개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공무원들이 관료주의적 타성을 깨고,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렇듯 혁신을 내세운 기업들이 각종 규제에 짓밟힌 채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데다, 전 세계적으로 AI와 딥테크 부문의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만큼, 혁신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번 정책은 환영할 만하다. 특히 금지된 것 빼고는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를 도입함으로써 국경을 초월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계획은 규제 지체 현상을 완화시킬 열쇠임이 분명하다. 최근 글로벌 경제 생태계가 창의적 기술을 보유한 혁신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클러스터를 조성해 유니콘을 육성하고 지역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정부의 시도가 국내 스타트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큰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