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등 주요국에선 기업의 ‘탐욕 인플레’가 고물가 키운 반면, 국내 기업들은 오히려 인플레 고통 분담

고금리 기조에도 요동치는 주요국 인플레, 기업들 ‘제품 가격 인상’이 주범 국내선 기업이윤 증가보단 ‘수입물가 상승’이 인플레이션 주도 한은 “전기·가스 등 공공부문이 추가 상승 막는 데 기여했으나 상황 달라질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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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물가, 민간소비지출 deflator, GDP deflator 상승률/출처=한국은행

지난해 세계 주요국 인플레이션의 주범으로 지목된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 탐욕에 의한 인플레이션) 현상이 국내에선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해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는 기업이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높여 많은 이윤을 가져간 것이 인플레이션의 원인이지만, 한국에선 오히려 기업들이 고통을 분담했으며 주로 수입물가 상승에 따라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유럽 등 주요국, 그리드플레이션에 고통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파른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덮쳤다. 세계 주요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과감한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해 왔지만, 현재 주요국 대부분 기존 목표치보다 높은 물가상승률에 고금리 기조를 놓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금리인상 효과가 미미한 이유가 기업의 과도한 이윤 추구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기업들이 원자재 등의 인플레이션으로 늘어난 생산 비용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는 식으로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4일 국제통화기금(IMF)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부터 올해 1분기까지 유럽의 인플레이션에 기업 이윤이 기여한 정도가 45%에 달했다. 유럽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지난 1년간 평균 8%를 웃돌게 된 원인의 거의 절반이 기업의 이윤 추구 때문이란 의미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도 지난 5월 통화정책회의에서 “특정 기업들이 인플레이션으로 발생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상황에서 자신들의 비용이 증가한 것보다 높은 가격을 제품에 전가해 수익을 끌어올렸다”고 비판한 바 있다.

미국도 유럽과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글로벌 시장 분석 기업 마켓워치에 따르면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 500(S&P500) 지수의 식품 및 소비재 대기업들은 생산과 제조에 들어가는 투입비용이 하락했음에도 여전히 가격을 인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소비자 옹호 단체 어카운터블 US도 보고서를 통해 “대다수 S&P500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가격을 인상하는 관행이 있으며, 이는 인플레이션 기간에도 기업 마진이 상향된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은, 국내 물가 지표 분해해 보니 주요국과 ‘상승 원인’ 달라

그리드플레이션이 세계적인 추세로 드러나면서 한국은행도 국내 물가 급등에 대한 기업이윤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분석하는 ‘기업이윤과 인플레이션: 주요국과의 비교’ 보고서를 지난 1일 발표했다. 한은은 민간소비지출 디플레이터(가격변동지수) 상승률을 피용자보수(임금), 영업잉여(기업 이윤), 세금, 수입물가 등으로 분해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기여도를 확인했다.

분석 결과 지난해 국내 4.4%의 민간소비지출 디플레이터 상승률 가운데 기업 이윤의 기여도는 -0.16%포인트로 나타났다. 지표가 음수라는 의미는 물가 상승이 아니라 하락에 기여했다는 뜻이다. 미국의 또 다른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꼽히는 임금 기여도도 국내에선 -0.01%포인트를 기록했으며 수입물가가 전체의 4.39%포인트를 차지하면서 결과적으로 물가 상승 기여도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과 유로 지역은 국내 상황과 크게 달랐다. 미국의 지난해 전체 민간소비지출 디플레이터 상승률 6.3% 가운데 3.73%포인트는 기업 이윤 증가가 주도했다. 국내와 달리 수입물가는 음수로 오히려 디플레이터를 낮추는 요인이었고, 유로 지역 역시 수입물가 기여도는 영업잉여와 피용자보수보다 작았다.

민간소비지출 디플레이터는 소비자물가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는 물가 지표다. 한은이 인플레이션을 측정하는 데 널리 사용되는 소비자물가지수 대신 이 지표를 사용한 이유는 소비자물가지수가 상향편의 등으로 인플레이션지표로서 적합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설득력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율을 측정하는 지표가 상향편의를 가질 경우 기대인플레이션에 반영됨으로써 의사결정의 왜곡이나 실질변수를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민간소비지출 deflator 상승률 분해 결과/출처=한국은행

‘라면’ 등 가공식품 가격 지속 증가, 하반기 그리드플레이션 가능성 높아

한은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지난해 국내 물가의 큰 폭 상승은 수입물가에 주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 유로 지역이나 미국에 비해 영업잉여와 피용자보수의 기여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한은은 이러한 결과를 정책당국의 물가안정 노력 등이 기여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은 관계자는 “정책당국의 물가안정 노력과 더불어 가계와 기업이 과도한 임금 및 가격 인상을 자제하는 등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물가 상승의) 2차 효과 확산이 제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면서 “또한 전기·도시가스 요금 인상 시기 조정 및 인상폭 축소 등으로 한전, 가스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이 지난해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한 점에 비춰 볼 때, 공공부문이 물가상승압력을 낮추는 데 상당히 기여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국제유가 등 원자재가격을 중심으로 지난해 크게 높아졌던 수입물가가 올해 들어 상당 폭 하락했다. 이에 따라 국내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6월 전년 대비 2% 후반대로 떨어졌으며 지난달에는 2.3%로 2021년 3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올해 민간소비지출 deflator 상승률 또한 수입물가 하락을 반영해 피용자보수나 기업이윤이 큰 폭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지난해에 비해 상당히 둔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향후 국제유가 추이, 이상기후에 따른 곡물가격 변동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아울러 올해 들어 수입물가가 낮아진 상황이 기업 이윤이 물가 상승 요인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6월 라면값을 예로 들며 기업의 제품 가격 인하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변화를 고려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선 라면이나 빵 등 가공식품 외에도 의류와 신발 등의 가격이 지속 상승하면서 그리드플레이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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