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일수록, 수도권일수록 유리하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의 ‘양극화’
노후 아파트들, 전기차 충전기 설치 두고 주민들 간 갈등 심화 지자체 차원에서 문제 해결 나선 서울시, 노후 지역 인프라 확충에 박차 노후 아파트 많은 지방은 ‘전기차 사각지대’, ‘인프라 양극화’ 과제 산적
국내 전기차 운전자가 점차 증가하는 가운데, 노후 아파트 단지 내 ‘전기차 충전기’ 설치 문제가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뜩이나 전력 공급이 부족한 노후 주택에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하는 것과 관련해 주민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전력 수급, 변압기 교체는 물론 재건축 문제까지 얽히며 이해관계 대립은 한층 첨예해지고 있다.
한편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지자체를 중심으로 인프라 확충에 속도가 붙는 추세인 반면, 노후 아파트가 많고 기본적인 인프라가 부족한 지방은 여전히 충전소 부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기차를 타고 싶어도 탈 수 없는 지역이 존재하는 가운데 전기차 보급 확산을 외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전력 부족한 노후 아파트, ‘충전기 갈등’ 거세져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전력 사용 설계량을 가구당 1㎾(킬로와트)로 계산해 준공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 제품의 수 및 종류가 크게 늘었고, 가구당 전력 사용량도 3~5㎾까지 뛰었다. 현재 전국에 노후한 전력 장비(3㎾ 미만)를 사용하는 아파트, 연립주택 등은 전체 공동주택의 32%인 7,900여 단지에 달하며, 이들 단지는 여름철 정전 등 고질적인 전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전기차 이용자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이들 노후 단지에서는 전기차 충전기 설치와 관련한 갈등이 번지기 시작했다. 노후 주택에 많은 전력을 사용하는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할 경우 전력 부족 문제가 한층 심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변압기를 교체하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는 국토안전관리원의 재건축 사업 안전 진단 매뉴얼 상 ‘시설 개선’에 해당해 재건축 심사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전기차를 소유하지 않은 주민들은 변압기 교체 비용 부담을 이유로 충전기 설치에 명백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전력의 변압기 교체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교체 비용 일부(20%)를 단지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변압기를 교체하면 재건축에 애로사항이 생기고,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일부 주민의 항의까지 더해지며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의 해결책, ‘공용 충전기’
서울시는 이 같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각지대 인프라 확보에 나섰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전기차 충전 인프라 부족에 시달리는 지역을 대상으로 전기차 충전기를 보급 중이다. 충전 사업자들이 기피하는 고지대 주거지역, 저층 주거지 밀집 지역, 노후 아파트 단지 등을 중심으로 충전 인프라를 확충해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앞서 서울시는 전력 용량 부족 등 기술적으로 충전기 설치가 어려운 지역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인근 공영 주차장, 공공건물 등에 급속 충전기를 보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노후 건물의 전력 한계를 고려해 중립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주변 이웃과 충전기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 공공성까지 확보한 것이다.
아울러 서울시는 2021년부터 시 곳곳에 가로등형 충전기, 볼라드형 충전기 등을 설치하고 있다. 노후 아파트 등 전기차 충전 시설을 설치하기 어려운 곳에 거주하는 시민의 편의성을 제고하기 위함이다. 가로등 충전기는 가로등과 닮은 외형의 50kW 급속 충전기로, 한 시간 만에 전기차를 완충할 수 있다. 볼라드형 충전기는 약 0.06㎡의 면적으로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 완속 충전기다.
이 같은 유형의 충전기는 골목길, 도로변에 비교적 쉽게 설치할 수 있다. 공용 충전기 설치를 통해 노후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출·퇴근길 거주지와 인접한 곳에서 차량을 충전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런 대체 인프라가 확산하면 노후 주거 지역 내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 역시 일부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후 아파트 많은 지방은 ‘인프라 격차’ 시달려
한편 수도권 대비 노후 아파트가 많은 지방의 경우 상황이 좋지 않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지방 아파트(620만9,281가구) 중 입주 20년 이상 된 노후 아파트는 52.22%(324만2,332가구)에 육박한다. 수면 아래에 잠든 ‘전기차 충전기’ 갈등이 수도권 대비 많다는 의미다.
주거 선호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노후주택 비율이 높다는 점도 문제다. 대전의 인기 주거 지역인 서구는 20년 이상 노후주택 비율이 무려 77.79%에 육박한다. ‘울산의 강남’으로 꼽히는 남구의 노후주택 비율은 64.77%, 부산의 부촌인 해운대구는 66.26% 수준이다. 주거 선호도가 높으면 인구 밀도는 자연스럽게 상승하게 되며, 이에 따라 전기차 이용자 역시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인프라 조성 여건이 부족한 가운데 수요만이 폭증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위험이 존재하는 셈이다.
실제 전기차 충전 인프라의 지역별 양극화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1년 9월 기준 수도권에는 총 3만1,363대의 충전기가 운영 중이었다. 반면 경상권(2만287대)을 제외한 △충청권(9,128대) △전라권(8,489대) △제주도(4,719대) △강원도(2,729대) 등 지방의 경우 운영 중인 충전기가 1만 대도 되지 않았다. 번지는 갈등을 막고, 전기차 보급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 전기차가 ‘어디서든’ 불편함 없이 운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