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에 비판 수위 높이는 과학계, ‘후폭풍’에 바람 잘 날 없는 정부
내년도 국가 R&D 예산 16.6% 축소, 기초연구 예산도 6% 줄인다 '선택과 집중' 강조하는 정부, 과학계는 "일방적 통보 폭력적" 해외 기관까지 동원하는 과학계, "이번 예산 삭감안은 '모순'"
내년도 국가 R&D 예산과 관련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예산 삭감에 대한 과학계의 반발과 우려, 예산 삭감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해명 등으로 정국이 혼란하게 흘러가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조성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은 내년도 R&D 예산 삭감으로 우려가 큰 연구 현장을 찾아 직접 소통에 나섰다. 조 차관은 이틀간 현장 간담회만 4번 개최해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리더연구자, 4대 과학기술원 교수·총장, R&D관리기관 전문가 등으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과학계 반발 불러온 예산 삭감안, 급한 불 끄러 나섰지만
19일 과기부에 따르면 조 차관은 이날 오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한국연구재단과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연이어 방문해 현장 목소리를 청취하고, 세계 최초·최고를 도전하는 R&D 시스템 개편 방향 등 정부 의견을 전달했다. 현장 연구자들은 정부의 R&D 시스템 개편 방향 등에 대해 대다수 공감하면서도 일부 기초연구 예산이 줄어든 데 우려를 표명했다. 각 과학 커뮤니티와 학회, 단체, 대학교수, 정부출연연구기관 등 관계자 전반이 연구 차질과 고용 악화를 걱정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앞서 과기부는 지난 8월 내년도 국가 R&D 예산을 올해 대비 5조2,000억원(16.6%) 삭감한 25조9,000억원으로 편성한 바 있다. 기초연구 예산은 올해보다 1,537억원(6%) 깎였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R&D 예산 나눠 먹기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며 “카르텔을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현장 연구자들은 “정부의 R&D 시스템 개편 방향 자체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일부 기초연구 예산이 줄어든 데 대해선 우려가 크다”고 전했다. 실제 과학계 내부에서도 “2008년 정부 R&D 예산이 10조원 돌파 후 양적 확대를 거듭한 만큼 점검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자체에는 공감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다만 예산 삭감 과정에서 현장 연구자들과의 논의 과정이 부족했다는 점이 반발의 주된 포인트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 차관은 각 연구기관을 급히 방문해 의견 교환을 나눈 등 급히 논란 진화에 나섰다. 지난 18일엔 서울 종로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리더연구자 간담회에 이어 KAIST(한국과학기술원)를 포함한 4대 과학기술원과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 총장·교수와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 자리에선 리더연구자 8명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연구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 지원 방안과 연구 문화 개선 필요성 등에 관한 의견을 청취했다. 4대 과기원 간담회에선 R&D 예산 삭감으로 학생연구원 인건비 보장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5%’ 선 깨진 R&D 예산, “국가 철학 흔들릴 수도”
최근 10년간(2013~2023) 정부 예산 총지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평균 4.83%에 머물렀다. 국가 R&D는 미래산업에 근간이 될 혁신기술 개발이 주된 임무인 만큼, 그간 정부는 국가 R&D 효율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미래 투자 차원에서 총지출 대비 5% 투자 기조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정부 들어 건전재정이 강조되면서 5% 투자 기조가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와 관련해 한 KAIST 교수는 “나눠주기식 예산 배분이 아닌 세계 최고 성과가 나올 수 있는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적 예산 배분’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불가피할 것”이라면서도 “수십 년간 이어져 오던 총지출 대비 5% 투자 기조가 무너지면 시스템 개혁이 아니라 국가의 철학 자체를 흔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계 현장에선 “국가 R&D 예산 삭감은 연구 생태계를 악화시키고 창의적인 연구 몰입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져 나온다.
다만 일각에선 “정부 차원에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겠다는 게 뭐가 문제인가?”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일을 제대로 안 하는 직원을 잘라내고 업무 수행 능력이 뛰어난, 열정 있는 직원에 더 많은 지원을 해주겠다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냐는 것이다. R&D 예산 삭감 후폭풍이 ‘미래 경쟁력 저하’를 야기할 것이란 회의적 의견이 언론 사이에서 새어나오고 있긴 하나, 오히려 선택과 집중을 강화함으로써 보다 장기적인 경쟁력을 챙길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누리꾼은 “예산 삭감을 두고 ‘돈 안 주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건 지나치게 비약적”이라며 “R&D 사업이 국가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디딤돌임을 잘 알고 있다면, 과학계 또한 시스템 효율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현 정부가 무작정 예산 삭감만 울부짖는 것도 아니다.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R&D 예산 책정 배경에 대해 “국가전략기술 확보를 위한 파급력 있는 연구가 추진되도록 지원할 예정”이라며 “바이오·우주 등 미래 산업 생태계를 주도하도록 대규모 플래그십 전략 프로젝트(총사업비 2조5,000억원) 등을 중점 추진하고 첨단 바이오 분야 한-미 공동연구인 ‘보스턴-코리아 프로젝트’와 같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글로벌 R&D 협력도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과기부도 전체 예산이 줄었지만 국정철학에 부합하는 주요 RD 사업 예산은 오히려 늘었다고 설명했다. 과기부는 “내년도 12대 국가전략기술 예산은 5조원으로, 올해 4조7,000억원 대비 6.3% 증가했다”며 “특히 △첨단바이오(16.1%↑) △AI(4.5%↑) △사이버보안(14.5%↑) △양자기술(20.1%↑) △반도체(5.5%↑) △이차전지(19.7%↑) △우주(11.5%↑) 등 7대 핵심 분야 투자가 증가했다”고 전했다.
“카르텔 매도 멈추고 예산 삭감 재고해야”
그러나 과학계 현장에선 여전히 R&D 예산 삭감을 재고해 달라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과학계 차원에서 정부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연대기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국가과학기술계 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연대회의를 출범한 건 현 윤석열 정부의 과학계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국가 과학기술을 바로 세워 국가의 미래를 지켜내고자 하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국가 R&D사업은 한 국가의 가장 근간이 되는 미래세대를 위한 디딤돌임에도 윤석열 정부는 과학기술기본법에 명시돼 있는 절차도 위반한 채 국가 R&D 예산 3조4,000억원을 일방적으로 삭감했고, 과학계 출연연의 주요 사업비는 30% 가까이 강제 삭감했다”며 “이는 명백히 과학기술을 무시하고 연구현장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현 정부는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묵묵히 이바지해 온 연구 현장을 비도덕적 카르텔로 매도하며 예산 삭감을 강행하고 있다”고 거듭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해외 기관을 활용해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실제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우리나라의 국가 R&D 예산 삭감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지난 6일 네이처는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지출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최근 예산 삭감이 예고됐다”며 “이번 예산 삭감안은 한국의 젊은 과학도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고 보도했다. 네이처는 국내 연구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현지 과학계의 분위기도 함께 전했는데, 인터뷰에 응한 KAIST 교수는 “KAIST와 같은 상위 연구기관도 10% 수준의 예산이 삭감될 수 있다”며 “이번 삭감안은 일종의 모순”이라고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예산 삭감 방어를 위한 과학계의 정부 압박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과학계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정부가 예산안 삭감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