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대 속 길 잃은 독일, ‘자동차 강국’ 이제는 옛말인가
전기차 시장에서 뒤처진 독일, 역전 위해 대규모 R&D 자금 투입 수소차 양성 전략 실패로 후발 주자 신세, 전기차도 '미적지근' 근간 산업 흔들리는 위기 상황, 핀란드 '노키아' 따라가나
전기차 시대 후발 주자로 전락한 ‘前 자동차 강국’ 독일이 역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에 따르면, 독일 완성차 및 부품 업체들은 2027년까지 전기차 배터리와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 등 전기차 연구개발(R&D)에 총 2,500억 유로(약 358조원) 규모 자금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신규 공장 건설과 라인 개편 등에 1,300억 유로(약 186조원)가 투입된다.
독일은 ‘탈원전’ 기조 이후 수소차 산업을 집중적으로 양성해 왔다. 하지만 글로벌 친환경차 시장의 주축을 차지한 것은 수소차가 아닌 전기차였다. 내연기관차 세대에서 ‘자동차 강국’으로 불리던 독일이 순식간에 후발 주자가 된 것이다. 국가 근간 산업의 글로벌 주도권을 잃은 독일은 과연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독일의 ‘수소차 양성’ 전략
탈원전 이후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진 독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산업용 전기 요금은 1MWh당 185.9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5.5달러) 대비 60% 이상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수소 경제 가속 정책의 일환으로 독일 정부는 한동안 수소차 산업 육성에 힘을 쏟아부었다.
이에 독일 차량 제조사들도 정부의 뜻에 따라 수소차 개발에 착수했다. BMW는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수소 콘셉트카 ‘iX5’를 개발, 뮌헨에서 열린 세계 최대 모터쇼 ‘IAA 모빌리티 2021’에서 시제품을 공개했다. iX5에는 BMW가 도요타와 함께 개발한 수소연료전지가 탑재됐다. 그간 “수소차는 기후변화 대응 솔루션이 아니다”라며 수소차에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던 폭스바겐마저도 독일 에너지 기업 크라프트베르크와 함께 새로운 수소 연료 전지를 개발, 독일에서 특허를 출원했다.
메르세데스-벤츠 GLC 수소차 버전 생산을 중단한 벤츠의 모회사 다임러그룹은 전기차에 주력하는 한편, 상용차 부문에서 다임러트럭과 협력해 수소차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임러트럭은 2020년 6월 볼보트럭과 합작사를 설립한 뒤 2025년 출시를 목표로 수소 트럭 개발에 힘쓰고 있다.
‘전기차’ 찾는 시장, 독일의 실패
하지만 글로벌 친환경차 시장의 수요는 수소차가 아닌 전기차에 몰렸다. 독일의 전략이 빗나간 셈이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세계 각국에 등록된 수소연료전지차의 총판매량은 1만692대로 전년 동기 대비 15.5% 감소했다. 수소차 시장 선두에는 독일 기업이 아닌 현대차(점유율 37.6%), 도요타(30.6%) 등 동아시아 기업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전기차 전문매체 인사이드EV에 따르면 지난 9월 독일의 신규 승용차 등록 대수는 22만4,502대였으며, 이 중 플러그인 전기차의 등록 대수는 지난해 대비 35% 감소한 4만7,097대에 그쳤다. 이는 전체 판매량의 21% 수준이다. 기업 구매자에 대한 전기차 인센티브가 종료되며 등록 대수가 급감한 것으로 풀이된다.
독일이 근간 산업인 자동차 부문에서 밀려나자, 시장에서는 독일 제조업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OECD는 지난 9월 내놓은 세계 경제 중간 전망에서 올해 독일의 경제 성장률이 -0.2% 수준일 것이라 전망했다. 주요 20개국(G20) 중 마이너스 예상치를 받아 든 국가 역시 아르헨티나(-2.0%)와 독일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10월 세계 경제 전망’에서 독일의 성장률 예측치를 -0.5%로 제시했다. 이는 7월 발표한 수정 전망(-0.3%) 대비 소폭 하향된 수준이다.
실제 독일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8월 산업생산은 전월보다 0.2% 감소하며 4개월 연속 뒷걸음질했다. 독일 경제 성장을 견인하던 ‘3A(자동차, 수출, 노동력)’의 부진이 수치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독일 경제 성장의 중심축이었던 내연기관차가 독일의 ‘아킬레스건’이 됐다는 평도 나온다.
독일, ‘노키아’ 잃은 핀란드와 다른 전철 밟을까
‘자동차’를 잃은 현재 독일의 모습은 ‘휴대전화’를 잃은 핀란드를 연상케 한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휴대전화 시장의 30%를 장악하며 한때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제조업체로 불렸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 등장 이후 휴대전화는 단순 통신 기기가 아닌 ‘휴대용 컴퓨터’로 진화했고, 노키아는 이 같은 휴대전화 시장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
이후 애플뿐만 아니라 삼성, 화웨이 등 각국 IT 기업이 기술력을 내세우며 ‘스마트폰 경쟁’에 뛰어들었다. 시장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노키아는 시장에서 점차 밀려났고, 결국 이전의 명성을 내려놓은 채 2013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됐다.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약 25%를 지탱하던 노키아의 몰락은 핀란드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핀란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경쟁력을 잃은 휴대전화 제작 분야에서 빠르게 발을 빼고, 이후 중소·벤처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핀란드 정부는 기술혁신청(TEKES)을 통해 신생 회사를 지원하고, 북유럽 국가 중 최저 수준의 법인세(20%)를 부과하는 등 창의적인 젊은이들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그 결과 노키아의 많은 직원들이 재취업 및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핀란드 경제는 새로운 ‘버팀목’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업계에서는 당시 핀란드의 상황과 현재 독일의 상황이 겹쳐 보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기술이 발전하며 국가 주력 사업이 흔들리는 위기의 상황, 독일은 과연 재기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