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농산물이 유럽에 ‘폭풍’ 불렀다? EU 수입 물량 통제 이유는
우크라이나 농산물 '무관세 수입' 이어오던 EU, 수입량 통제 나선다 우크라이나산 저가 농산물로 흔들리는 시장, 유럽 농민들 '격분' 농산물 분쟁이 무기 지원까지 끊었다? 폴란드의 '태세 전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전(2022년 2월 24일)으로부터 약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끝을 알 수 없는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방국들의 ‘아낌없는’ 우크라이나 지원에도 본격적인 한계가 찾아왔다. 31일(현지시간) 마르가리티스 스히나스 EU 집행위원회 부집행위원장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 우크라이나 농산물 수입량을 사실상 통제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관세 면제 혜택을 받은 저렴한 우크라이나 농산물이 유럽 시장에 불러올 추가적인 혼란을 차단하겠다는 구상이다.
“더 이상 못 참는다” 유럽 농민들의 분노
EU는 2022년부터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농산물 수출에 난항을 겪는 우크라이나 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방안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한 현재, EU 회원국 곳곳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저렴한 농산물이 시장 생태계를 망치는 ‘외래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EU 회원국에서 생산한 농산물로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과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부 EU 회원국에서는 대규모 농민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달 프랑스에서 시작된 시위는 △벨기에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을 중심으로 확산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등 남유럽 등지까지 번졌다. 이에 EU 측은 모든 우크라이나 상품에 대한 관세 면제를 2025년 6월 5일까지 추가 연장하되, 농업 분야 등에서 세이프 가드(긴급 수입 제한)를 병행하겠다고 밝히며 본격적인 진화에 나섰다. 시장 상황에 따라 수입량을 통제하며 시장 혼란을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차후 EU 집행위원회는 우크라이나산 상품으로 인해 시장이 ‘심각한 혼란’에 빠질 경우, ‘신속한 시정 조치’를 통해 상황을 조정할 계획이다. 회원국이 시정을 요청하면 집행위원회가 시장 왜곡 여부를 평가, 적절한 조치를 제안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설탕과 닭고기, 달걀 등 일부 민감 품목에 대해서는 자동 면세 중단 조치를 시행한다. 대상 품목의 수입량이 2022년과 2023년의 평균치를 초과하면 자동으로 세금을 매기는 식이다.
우크라이나 농산물이 야기한 혼란
전쟁 이전인 2020년, 우크라이나는 △세계 해바라기유 수출 1위(세계 수출총액 중 39.5%) △옥수수 수출 4위(13.2%) △밀 수출 5위(8%) 등을 기록하며 ‘농업 강국’으로 꼽혔다. 하지만 러시아 침공 이후 상황이 뒤집혔다. 전쟁의 공포에 우크라이나의 농작물 생산량은 눈에 띄게 급감했고, 러시아의 항구 봉쇄로 주요 수출로까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산 농작물이 이전과 같은 시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이 만든 농산물 시장의 ‘빈틈’은 EU 회원국에 일시적인 반사이익을 안겨줬다. 대표적인 수혜국이 이번 농민 시위의 최전선에 선 프랑스다. 우크라이나 밀 공급이 끊기며 공급망 전반에 혼란이 발생한 가운데, 고객사들은 대체 공급처로 세계 4위이자 유럽 최대 밀 수출국인 프랑스를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가 ‘전쟁 속 봄날’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같은 반사이익은 오래가지 못했다. EU가 흑해 수출로가 막힌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EU 회원국 영토를 통한 ‘육로 수출’을 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EU 회원국 곳곳에는 ‘무관세 혜택’으로 가격이 대폭 하락한 우크라이나산 곡물이 대거 유입됐다. 2022년 EU에 공급된 우크라이나산 곡물만 자그마치 4,100만 톤에 달한다. 이는 같은 해 우크라이나의 전체 곡물 수출량 중 약 60% 수준이다.
저렴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유입되자, 유럽 농민들은 순식간에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시장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가뭄, 산불, 홍수 등 재해 △인플레이션 △경유 사용 제한, 휴경지 유지 의무 등 EU 농업 규제 △경작 비용 상승 등 악재가 누적됐고, 결국 시장을 뒤흔드는 외래종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번 수입 물량 제한 조치는 이 같은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타협책’인 셈이다.
“더 이상은 무리다” 줄어드는 우크라이나 지원
우크라이나발 농산물 분쟁은 EU 회원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등을 돌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폴란드를 비롯한 일부 회원국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해 5월 EU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유입으로 큰 혼란을 겪은 5개 회원국(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루마이나·슬로바키아)를 대상으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직접 수입 금지 조치를 시행했고, 약 4개월 뒤 해당 조치를 해제했다.
하지만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는 EU 차원의 수입 금지 조치가 종료된 이후 자체적으로 해당 조치를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이들의 수입 금지 조치가 국제법상 의무 위반이라고 주장, 3개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분노한 폴란드는 더 이상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우크라이나의 주장에 맞섰다. 러시아 견제를 위해 우크라이나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던 폴란드가 결국 차갑게 등을 돌린 것이다. 비슷한 시기 슬로바키아 역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한국, 미국, 일본 등 우방국 역시 이해관계의 ‘폭풍’에 끌려 들어가며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떠안았다. 장기간 전쟁의 피로감에 시달린 이들 국가는 우크라이나를 향한 지원을 하나둘 내려놓고 있다. 최대 지원국이었던 미국이 지난달 예산 확보에 실패,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우방국들이 전쟁 장기화로 인해 ‘한계’를 맞이했다는 평가가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