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기술 유출 처벌 수위 높인다, 현장에선 “기업 자율성 침해” 우려
정부,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추진
기술 유출 적발 사례 과반은 ‘반도체’
소부장 위주 중소기업계 현실 반영 미비
반도체를 비롯한 국가핵심기술 유출 사례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정부가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적 근거 마련에 속도를 낸다. 불법 행위에 대한 양형기준을 기존 15억원 이하에서 최대 65억원까지 상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해당 법안은 처벌 수위를 높이고 국가의 관리·심사 기능 강화에 중점을 뒀다. 업계에서는 법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산업 현장의 실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산업기술 유출 적발 사례, 202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세
7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상반기 내 업종별 특성을 반영한 기술 수출 심사 절차 간소화 방안을 마련한다. 또 기존 격월 개최하던 산업기술보호위원회는 매월 개최로 변경해 심사 기간을 단축한다. 산업부는 이르면 오는 3월 이같은 내용을 담은 ‘무역기술안보전략’을 발표할 방침이다. 또 중장기 국가핵심기술 보호 제도 개선안을 담은 ‘제5차 산업기술보호 종합계획’도 하반기 발표 예정이다.
지난 2016년까지 누적 25건이 적발된 산업기술 유출 사례는 2020년대 들어서면서 급증했다. 2020년에는 17건이 적발됐고, 2021년엔 22건, 2022년에는 20건이 적발된 데 이어 지난해는 최근 5년 사이 가장 많은 28건이 적발됐다. 이 중 국가핵심기술은 5건, 산업기술은 23건이다.
분야별 유출 현황에서는 반도체 분야 기술 유출이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기준 23건의 산업기술 유출 적발 사례 중 과반인 15건이 반도체 분야에서 발생했다. 이어 디스플레이와 자동차 분야에서 각 3건이 적발됐고, 생명공학과 전기·전자 분야는 각 1건씩 적발됐다.
국가별 유출 현황은 구체적으로 집계된 바 없지만,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기술의 비중이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국가별 정보는 구체적으로 수집 전이지만, 최근 기술 유출 사건 대부분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확인했다”며 “최근 기술 유출 수법은 해외 기업이 국내에 기업을 설립한 후 기술 인력을 고용하거나, 외국인이 국내기업을 인수해 개발 중인 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등 갈수록 지능화·다양화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같은 기술 유출 증가에 대한 대응책으로 정부는 △처벌강화 △관리강화 △심사강화 △기업지원 등을 내놨다. 먼저 처벌 구성요건을 목적범에서 고의범으로 확대해 기술 유출 범죄 벌금 한도를 65억원 이하(국가핵심기술) 또는 30억원 이하(산업기술)로 상향한다. 이와 함께 기술 유출 과정에 부수적 역할을 하는 브로커도 처벌할 수 있도록 침해행위를 확대하고, 침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는 기존 3배에서 5배로 늘린다.
나아가 판정신청통지제를 도입하고 보유기관 등록제를 신설하는 등 정부의 관리강화 방안도 마련한다. 판정신청통지제는 국가가 직권으로 특정 기업의 국가핵심기술 해당 여부를 판정신청 및 통지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지금까지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국가핵심기술 해당 여부를 판정신청하는 경우에만 기술보호가 가능했다.
반도체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 심사를 강화한다. 이에 따라 앞으로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을 매입하는 외국인에게 공동 신고 의무가 부여된다. 인수 주체인 외국인과 피인수 국내 기업이 공동으로 정부에 인수합병(M&A)을 신고해야 하는 제도로, 피인수기업에 국한됐던 신고 의무자 범위에 인수자도 포함해 적극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산업기술보호법(산기법) 개정안은 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해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견이 제시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소통하고 적극 수용해 법안 통과를 서두르겠다”고 전했다.
“무조건적 처벌 강화, 능사 아냐”
업계에서는 판정신청통지제 도입을 두고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기술 탈취 또는 유출의 목적이 아님에도 법이나 제도에 대한 충분한 숙지가 부족한 경우 과도한 처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경남 창원에서는 한 군수 업체에서 근무하던 연구원이 잠수함 설계도면, 부품리스트 및 제작방법 등 자료 4,000여 개를 개인 노트북에 저장했다는 혐의로 실제 기술 유출 행위가 없었음에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는 등 처벌받은 바 있다.
외국 자본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계의 실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특히 국내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의 상당수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사업을 영위하는 등 독자적인 기술과 자본력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과 상황이 다른데, 외국인 투자가 제한될 경우 사업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 관계자는 “사업 확대를 위한 M&A 등 기업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고 짚으며 “통상 인수나 합병 등은 투자자에게 신고의무를 부여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투자 유치를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기술 보호조치 하에 해외 진출을 하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