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R&D다운 R&D 위해 내년 역대 최대 예산 편성”, 혈세 낭비 척결될까
대통령실 “내년 R&D 예산 역대 최대 규모로 대폭 증액”
내년 R&D 예산 '역대 최대' 발표에 과기계 일단 "환영"
떡볶이 개발에도 예산 펑펑, 정교한 정책 집행 우선 돼야
정부가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기존 역대 최대 R&D 예산은 2023년 31조1,000억원이었다. 지난해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계 카르텔’을 언급한 가운데 올해 R&D 예산을 대폭 삭감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다만 담당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세계 최초·최고 기술을 위한 R&D 시스템을 강조하며 이러한 원칙에 부합하는 분야를 중심으로만 예산을 편성하겠다는 방침이다.
내년 R&D 예산, 31조원+α 역대 최고 수준 편성
3일 박상욱 과학기술수석은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내년도 R&D예산에 대해 “대통령을 비롯해서 경제부처 과기정통부 등 저희의 목표 수준에 대한 공감대는 역대 최고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R&D 개혁이 완료됐다고 보긴 어려우나 세계가 기술 경쟁에 뛰어드는, 유례 없이 빠른 기술 변화의 파고 속에서 개혁 작업에 매달릴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정부는 내년도 R&D 예산을 다시금 역대 최대 규모로 회귀시킨다는 방침이다. 종전 최대 규모였던 2023년도 31조1,000억원보다 더 많은 예산을 편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예산 증액과 함께 R&D 시스템도 개선한다. 먼저 연중 수시로 과제가 시작될 수 있도록 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제도를 손본다. R&D 예타는 정부 R&D 관련 대규모 신규 사업에 대한 예산 편성 등을 위해 실시하는 사전 타당성 검증·평가를 말한다. 예타 제도는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막는 제도지만 한편으론 혁신 기술 개발에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신청 접수부터 결과까지 최소 6개월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에 예타 면제 제도를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나아가 정부 재정 투입 규모의 상한 액수 조건을 완화하는 식으로 R&D 예타 요건을 완화하는 방침도 고려 중이다.
최고·최초의 연구를 제대로 가려내기 위한 카드도 꺼내 들었다. 정부는 2000년대 중반 활발히 도입이 논의됐던 ‘평가위원 마일리지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해당 제도는 평가 이력 및 점수 등 활동 전반을 기록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해 평가위원들의 평가 활동 결과를 지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제도로, 높은 점수를 받은 평가위원에게는 포상 등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정부는 평가위원 마일리지제를 확대 설계해 내년부터 전면 시행할 계획이다. 아울러 부처 간, 기관 간 벽을 허물고 산학연병 연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부처별 R&D 지출 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해 정부 출연 연구기관 간 협력을 도모하는 ‘글로벌 톱(TOP) 전략연구단’을 확대한다.
과학기술계 “우선은 환영한다”
정부가 1년 만에 R&D 예산을 ‘원상 복구’ 이상으로 회복하기로 결정한 건 지난해 문제로 지적됐던 각종 비효율과 낭비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는 R&D 예산 구조조정을 통해 연구 현장의 비효율이 개선됐다는 내용의 보고를 대통령실에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과기정통부와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 협의를 거쳐 내년도 R&D 예산의 원상복구가 결정됐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해 하반기 낭비 없이 제대로 연구하는 시스템만 갖춰지면 예산을 복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100조원까지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작년 11월 2일 대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열린 우수 신진 연구자와의 대화에서 윤 대통령은 ‘제대로 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우수한 연구자가 예산을 쓸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고친다’는 전제로 예산을 지금의 2배, 3배, 100조원까지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같은 달 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2025년 예산안 편성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지침’을 의결하면서 “내년도 R&D 투자 규모는 대폭 확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R&D 예산 원복에 대해 과기계는 우선은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문성모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 회장은 “R&D 예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역대 최대치로 편성하겠다는 목표는 환영할 만하다”면서도 “지난해처럼 연구 현장을 피폐화시키는 예산 삭감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현장과의 소통을 원활히 하고 의견을 청취해 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다만 총선 직전의 발표라는 점에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예산 증액 얘기는 그 난리가 났던 작년 초에도 있었다”면서 “대통령이 과기 분야에 투자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해 놓고 두 달 만에 확 뒤집어 버렸기 때문에 신뢰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총선이 코 앞이라 말부터 먼저 던진 게 아닌지 의구심이 크다”며 “현재의 말들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관건은 낡은 관행과 비효율 제거
R&D는 한국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성장판으로 거론된다. 정부 R&D 예산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 때도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기조 아래 증감돼 왔다. 2008년 10조원을 돌파한 국가 R&D 예산은 2019년 20조원을 넘어섰고, 2023년에는 31조원을 돌파했다. 올해를 제외하고 매해 역대 최대 규모를 경신해 온 셈이다. 하지만 R&D 예산은 투입된 돈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R&D 예산을 ‘고비용, 저효율’의 대표 사례로 꼽을 정도다. 또한 실제 연구 실적과 관계없이 관습처럼 R&D 예산을 타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모 대학의 A교수는 집단 의사 결정 과정을 연구해 ‘합리적인 행위자들의 갈등 조정 프로토콜을 제시하겠다’며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R&D 지원금 명목으로 4억8,8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A교수는 이와 유사한 주제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2년간 과기정통부의 신진연구지원사업을 통해 1억4,200만원의 지원금을 수령한 바 있다. 기획재정부가 제시한 나눠먹기식 사례의 대표적 예다.
국가 R&D 예산이 민간 업체의 수익에 초점을 맞춘 기술 개발에 투입된 사례도 있었다. B기업은 3개월간 정부에서 지원받은 500만원으로 지난 2022년 누룽지 떡볶이를 개발했다. B기업은 이후 누룽지 떡볶이용 떡 압출기계를 개발할 때도 정부 R&D 예산을 사용했다. C사는 스마트팜 관련 R&D 예산 1억원을 지원받았지만, 정작 개발한 건 복숭아분말을 이용한 과일 찹쌀떡과 특수비닐포장 시스템이었다. 자사 수익 확대를 위한 개발에 혈세가 낭비된 것이다. 정부 R&D 예산이 갈비업체의 메뉴 개발에 사용되기도 했다. 2021년 D사는 가축 먹이주기 기술개발 R&D 사업을 활용해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쇠고기 메뉴를 개발하는 데 예산을 사용했다. 국가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적 성격의 기술에 투자하자는 예산의 근본적 취지가 무색해진 단적인 사례들이다.
묻지마 복지류의 R&D도 다수 포착됐다. 지난해 1,0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받은 디지털 격차 해소 기반 조성 사업이 대표적이다. 좀비기업 생존자금으로 R&D 예산이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연간 매출액 1억원이 채 안 되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E사는 손실 규모도 막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2020년부터 4년간 14억원의 정부 R&D 자금을 지원받아 기업 생존 자금으로 활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 R&D 예산에는 권리만 있고 책임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연구비 나눠 먹기와 과제 쪼개기 등 낡은 관행과 비효율은 제거하면서도 혁신의 날개를 꺾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국가 R&D 예산은 과거 D램 반도체, 고속철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등 혁신 성장을 이끈 핵심기술 개발의 신화를 재현할 저력을 갖고 있는 만큼, 예산의 증감보다는 섬세하고 정교한 정책 집행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