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내고 더 받는’ 연금 개혁안 선택한 시민 대표단, 소득보장 아래 미래세대 부담·경영계 의견은 뒷전?
각계 의견 나뉘는 연금 개혁안, 시민 대표단의 선택은 "더 내고 더 받자"
미래세대에 부담 떠넘긴단 지적 쏟아져, "저출산 상황에 지속가능성 없다"
경영계서도 비판 목소리, "시민 대표단 의견만 일방적으로 수용해선 안 돼"
국민연금 개혁 토론 끝에 시민 대표들이 ‘더 내고 더 받는 방안’을 최종 선택했다. 국민연금 재정 고갈 우려와 한국의 높은 노인빈곤율을 함께 고민한 결과라는 입장인데, 문제는 해당 방안을 시행하면 개혁 없이 현행을 유지할 때보다 향후 70년간 누적 적자가 702조원(약 5,120억 달러) 더 늘어난다는 점이다. 이에 시민 대표단이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선택을 했다는 비판이 사회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
시민 대표단 “국민연금 보험료율 올려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는 22일 500명의 시민 대표단을 대상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 공론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론화위에 따르면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도 40%(2028년 기준)에서 50%로 높이는 방안(1안)이 시민 대표단 492명 중 56%의 선택을 받아 더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보험료율만 12%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유지하는 방안(2안)은 42.6%가 선택해 1안 대비 13.4%p 차이로 뒤처진 것으로 알려졌다. 연금특위는 조만간 공론화위의 최종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여야 간 연금 개혁 합의안 도출에 나설 예정이다.
시민 대표단은 소득보장의 필요성에 공감해 1안을 택했단 입장이지만, 외부적으론 비판이 적지 않다.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하겠단 것 아니냐는 시선에서다. 실제 연금특위에 따르면 해당 안이 채택될 경우 현재 10세 이하인 세대는 기금 고갈 뒤인 2078년 월 소득의 43.2%까지 보험료로 내야 한다. 현행 제도를 유지할 때의 35%보다 8%p가량 더 높다. 반면 기성세대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9%만 보험료로 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애초에 개혁안 도출을 여론에 맡기자는 발상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연금 개혁은 미래세대에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피한데, 연금 개혁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현세대 비전문가들이 모여 결론을 도출하면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심지어 연금 개혁안을 1안과 2안으로 좁힌 것도 전문가가 아닌 이해당사자가 결정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두 안을 질문지에 넣기로 한 건 노동계, 사용자, 지역가입자, 청년, 수급자 단체 대표 등 36명으로 구성된 의제숙의단이다. 국민연금 납부 및 수급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들이 선택지를 만들면서 개혁이라고도 볼 수 없는 안이 포함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도 재정당국도 ‘난감’, “지속가능성 없어“
정부도 당혹스럽다는 분위기다. 심각한 저출산·고령화로 악화 일로인 재정 여건과 미래세대 부담을 감안하면 소득대체율 인상은 지속가능성이 없는 ‘개악’이란 게 정부 내부의 판단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전 세계에서 홍콩 다음으로 가장 낮았다. 올해도 합계출산율은 다시 0.68명으로 낮아져 0.7명 선이 무너지고 내년엔 0.65명까지 내릴 전망이다. 인구소멸 위기 아래 ‘더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 개혁안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전문가들의 쓴소리가 쏟아진다.
실제 2070년께가 되면 ‘더 받는 쪽’인 수급자 수가 ‘더 내는 쪽’인 가입자 수를 역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약 24% 수준이었던 국민연금 수급자/가입자 비율은 2050년이 되면 수급자 1,467만 명, 가입자 1,534만 명으로 95.6%까지 늘어 사실상 가입자와 수급자 비율이 같아진다.
특히 2055년 재원이 고갈된 후에도 국민연금이 지속된다고 가정하면 2070년엔 수급자 수가 1,501만 명으로 가입자(1,086만 명) 수를 역전하게 된다. 이를 비율로 계산하면 138.2%다. 보험료 인상·소득대체율 감소에만 매달린 단순한 개혁안으론 기금 소진 시점을 조금 늦추는 정도 외엔 효용이 없을 것이란 지적이 거듭 나오는 이유다. 각계 전문가들도 “근본적인 시스템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단순한 개혁안이 최종안으로 선택된 건 아쉬운 부분”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모양새다.
재정당국도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더 받는 안을 지지하는 소득보장파 학자들은 공론화 과정에서 1안 채택 시 늘어나는 미래세대 부담을 국내총생산(GDP)의 2%에 달하는 국고 투입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을 뜯어 보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란 것이다. 기재부에 따르면 이들 말대로 국고를 투입할 경우 2023년 45조원, 2050년엔 102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규모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기재부 관계자는 “건강보험, 장기요양보험, 기초연금 등 고령화에 따라 다른 복지 지출이 빠르게 늘고 있는데 국민연금에까지 국고를 투입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국고 투입을 현실화하려면 세금 인상이 불가피할 텐데, 국민들이 이를 감내할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경영계서도 볼멘소리, “노동계 의견만 강하게 수용됐다”
일각에선 시민 대표단의 연금 개혁안에 노동계의 의견만 강하게 들어간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앞서 공론화위는 시민 대표단의 의견을 모으기 전 ‘이해관계자 공청회’를 먼저 개최한 바 있다. 연금 개혁 논의에 대한 경영계, 노동계, 청년 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겠단 취지였다. 공론화위에 의하면 이해관계자 공청회에서 가장 극명히 의견이 갈린 게 ‘더 받는’ 소득대체율 인상이었다. 경영계 측은 현행 40%를 유지하거나 필요하다면 추가 인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노동계는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일 것을 고수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경영계는 시민 대표단의 연금 개혁 최종안에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의제숙의단에 참여한 경영계 관계자는 “소득보장안은 오히려 누적 적자를 늘리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선택”이라며 “소득대체율 인상을 위해 보험료도 재정안정안에 비해 더 높였는데 보험료 1%p 감소 당하는 것도 버거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관계자 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공론화 결과를 일방적으로 악용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론화 과정에서도 경영계와 청년 자영업자들은 최종안에 확고한 반대 의지를 드러내 왔는데, 이같은 상황에서 ‘의견 수렴’을 이뤘단 미명 아래 정책을 취사선택하는 결과가 초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김상균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 위원장도 “이번 설문 결과를 (정치권 등이) 잘못 해석할까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며 “최종안은 두 안을 조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됐다는 것이지 어느 쪽이 승리하거나 패배했다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야권 의원들이 시민 대표단의 결정을 두고 정부에 연금 개혁 최종안 수용을 압박하는 데 우려의 뜻을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단순한 여론조사를 넘어 경영계 등 각계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