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소부장 기업들, 삼성전자와 ‘텍사스 반도체 생태계’ 합류
삼성 반도체 공장 짓는 테일러에 국내 소부장 기업 동행
동진쎄미켐·솔브레인 등 핵심소재·부품·장비 공급 예정
지역 내 반도체 생태계 구축 위해 소부장 기업 유치전도
삼성전자의 최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이 들어서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가 첨단 제조업의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 정부와 텍사스주가 대형 팹과 함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에 대한 유치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도 잇따라 미국 현지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테일러·칼린 등 삼성전자 공장 인근에 생산시설 조성
2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동진쎄미켐, 솔브레인, 에프에스티, 한양이엔지을 등 국내 주요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은 최근 미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다른 소부장 기업들도 삼성 테일러 팹 인근에 생산공장 건설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미국 현지에서의 글로벌 마케팅을 통해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반도체 업체로 판매망을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먼저 삼성전자의 3D 낸드 포토레지스트 독점 거래처인 동진쎄미켐은 텍사스주 킬린에 반도체 웨이퍼 세정 용도로 쓰이는 황산과 시너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두 공장 건설에 각각 1억 달러를 투자해 올해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한다. 동진쎄미켐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 잠재고객을 발굴함으로써 해당 시설을 반도체 소재를 공급하는 생산거점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반도체 소재기업 솔브레인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위치한 RCR 테일러 물류단지 내 약 34만㎡ 부지를 매입했다. 삼성전자가 신설하는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에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이다. 솔브레인은 삼성전자에 고대역폭메모리(HBM) 소재인 화학기계적연마(CMP) 슬러리를 단독으로 납품하고 있다.
클린룸 시스템 전문업체인 한양이엔지는 테일러에 들어서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클린룸 공사에 참여한다. 한양이엔지는 클린룸 배관과 고순도 화학약품 중앙공급장비(CCSS), 초순수 시설, 초고압 설비 등을 생산·설치하는 기업으로 배관 공사와 CCSS 업계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국내 최대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업체 아이마켓코리아도 테일러에 85만8,000㎡ 규모의 복합 첨단산업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아이마켓코리아는 이곳에 처음 진출하는 국내 소부장 기업들이 인허가 등 복잡한 절차를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운영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산업단지 내 다양한 공유시설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동진쎄미캠 TSIC EC 참여, 韓 기업 수혜 확대 기대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지속가능한 반도체 생태계 구축를 위해 한국의 소부장 기업을 유치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실제로 올해 2월 개최된 ‘미국 반도체 투자 설명회’에는 텍사스를 비롯해 뉴욕, 아리조나, 인디애나, 콜로라도 등 총 5개 주 관계자들이 찾았다. 이 자리에는 미국 진출을 모색하는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 관계자 1,300여 명이 참석했는데, 미국 주정부 관계자들은 각 지역의 반도체 지원 혜택과 인프라 현황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가장 돋보였던 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이 건설되고 있는 텍사스주였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브랜든 라이델 텍사스주 테일러시장과 빌 그라벨 텍사스주 윌리엄슨 카운티장이 직접 나서 지역 내 다양한 혜택을 약속했다. 라이델 시장은 “삼성전자가 테일러로 온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수자원이 풍부하고 전력망 관리가 잘 돼있으며 토지가 평지인 데다 저렴하다”며 “여기에 다양한 보조금도 지급하고 허가 절차가 신속하게 제공된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라벨 카운티장도 “한국 방문 기간 중 30여 개 공급사들과 미팅을 했는데 윌리엄슨 카운티에 오고자 하는 기업들이 많았다”며 “한국을 벗어나 미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텍사스주로 오는 한국 기업들에게 다양한 지역 내 혜택과 인프라 지원 등 파트너십을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3월에는 텍사스 현지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주 정부가 주관하는 ‘텍사스 반도체 혁신 컨소시엄 집행 위원회(TSIC EC)’가 발족되기도 했다. TSIC EC는 텍사스주지사 산하 위원회로 텍사스 반도체 산업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주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을 기획·집행하고 현지 기업에 대한 연구개발(R&D)·생산을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국내 기업 중에는 삼성전자와 동진쎄미켐이 참여하고 있어 보조금 지원 등 텍사스에 진출한 한국 반도체 기업의 수혜가 예상된다.
지정학적 요인이 변수, 혜택과 규제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이렇게 텍사스주를 비롯해 미국 각 지역이 한국의 소부장 기업 영입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탄탄한 반도체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대형 제조 공장만 유치해서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풀이된다. 이에 미국 정부도 올해부터 칩스법(반도체·과학법)의 지원 범위를 팹과 공장에서 소재·장비기업으로 확대했다. 단순히 팹만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 체인과 생태계 전체를 이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혜택을 주겠다는 취지다.
미 상무부가 삼성전자에 64억 달러(약 8조8,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지난 15일(현지시간)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도 백악관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사전 브리핑에서 삼성전자의 신규 팹 건설을 계기로 텍사스주에 구축될 반도체 생태계의 의미와 가능성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특히 일자리 창출과 인력 양성의 경제적 효과에 있어 삼성전자가 이바지할 부분을 강조했다.
당시 러몬도 장관은 “삼성전자의 투자 프로젝트를 통해 공장이 지어질 텍사스주를 최첨단 반도체 생태계로 발전시킬 것”이라며 “삼성전자의 이번 투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와 지역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관련 공급기업, 기타 서비스 기업 등이 들어서면서 향후 5년 이내에 건설 일자리 최소 1만7,000개, 제조업 일자리 4,500개 등이 창출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미 상무부와 텍사스주 정부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공장이 있는 텍사스 테일러·오스틴 지역의 초·중·고교와 2년제 기술 전문학교, 4년제 대학 등에 대규모 투자를 하며 인력 양성을 돕고 있다. 나아가 이번에 미국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 중 4,000만 달러는 지역 인력 교육·양성 등에 쓸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일각에서는 소부장 기업의 미국 진출을 두고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동남아시아까지 글로벌 진출 기회가 늘어나고 있지만 고질적인 지정학적 갈등이 일종의 ‘올가미’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로 올해 초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에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에도 자국에 적용되는 반도체 장비 대중 수출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통제가 동맹국보다 복잡하고 포괄적이어서 자국 기업들이 경쟁에서 불리한 여건에 있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은 레거시 공정이 많은 중국에서 매출을 올리는 곳이 많아 당장 대중 수출길이 막히면 기업들의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프렌드 쇼어링 정책 등으로 전 세계 곳곳에 클러스터 형태로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는 가운데 국내 소부장 업체들의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며 “각 국가와 지역에서 주는 직접적 혜택과 향후 우려되는 규제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