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건설사 부실, 신탁사로 전이 ‘부메랑 된 책임준공’
실적 부진·공사비 급등에 중소형 건설사 리스크↑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PF 23%, 기한 넘겨
신탁계정대 30%, 한국자산신탁 65%도 급증
신탁사의 ‘책임준공’ 보장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문제를 터트리는 새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중소 건설사를 대신해 책임준공 의무를 떠안은 부동산 신탁사들이 잇따라 손해배상 소송에 직면하면서다. 부동산 호황기에 효자 상품으로 주목받은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이 건설사 부실로 인해 신탁회사에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양상이다.
안성·평택 물류센터 채권단, 신한자산신탁에 손배 소송
8일 법조계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23개 새마을금고로 이뤄진 경기도 안성시 물류센터 건설공사와 평택시 물류센터 건설공사의 PF 대주단은 최근 신한금융그룹 산하 신한자산신탁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대주단은 손해배상청구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같은 금융지주인 신한은행에 신한자산신탁 명의로 개설한 예금에 대해 가압류까지 신청했다. 대주단이 제기한 손해배상액은 총 770억원이다. 두 사업 시행자들은 애초 지난 3월 말까지 물류센터를 완공할 계획이었지만 기한 내에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
책임준공형 신탁사업은 지난 2015년 도입해 신용도가 낮은 지역 중소 건설사를 대신해서 신탁사가 대주단에 책임준공 확약을 제공해 PF 대출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는 것으로, 주로 물류센터나 오피스텔처럼 비주택을 대상으로 한 사업이 많다. 신탁사가 사업비의 2%를 떼가는 고수익 사업이라 금융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부동산 호황기에는 공사 중단 사례가 드물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2022년 하반기부터 건설 경기가 꺾이면서 책임준공형 신탁으로 추진한 다수의 PF 사업이 부실 위험에 직면했다. 특히 시공을 맡은 중소 건설사 파산이 본격화하면서 추후 신탁사에 책임준공 의무가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나이스신용평가 “책임준공형 PF 23% 위태”
실제로 이달 초 나이스신용평가는 지난해 말 기준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현장 중 23%가 책임준공 기한을 넘긴 것으로 파악했다. 이 중 신탁사가 책임져야 하는 곳은 8%로 추산했다. 이는 나이스신용평가가 신용등급을 매기는 대신자산신탁과 우리자산신탁을 비롯해 7개사의 관련 PF를 분석한 결과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이를 토대로 국내 14개 부동산 신탁사의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현장 중 책임준공 기한을 넘긴 사업장 관련 PF는 3조8,000억원(신탁사 자기자본의 104%), 책임준공 기한을 넘겨 소송에 직면한 사업장 관련 PF는 1조9,000억원(자기자본의 35%)으로 추계했다.
금융투자협회 전자공시서비스에 따르면 작년 부동산 신탁사 14곳의 전체 당기순이익은 2,326억원으로 전년(6,426억원) 대비 크게 줄었다. 부채 총계는 2022년 약 1조8,143억원에서 지난해 2조8,484억원으로 1조원 가까이 늘었다.
신탁계정대 규모도 급증, 책임준공확약 손질해야
신탁사가 공사를 서두르기 위해 직접 시행사에 빌려준 자금(신탁계정대) 규모도 급증한 것으로 파악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토지신탁의 신탁계정대는 2022년 말 5,514억원에서 지난해 6월 7,154억원으로 30% 늘었다. 한국자산신탁 역시 같은 기간 2,240억원에서 3,690억원으로 65% 급증했다. 신탁사들의 계정대는 시행사가 신탁사에게 개발 사업을 위해 빌린 돈으로, 책임준공형 관리형 개발 신탁 계약에 따라 시공사가 공사비 부족 등으로 사업을 포기할 경우 신탁사가 자체 계정에서 자금을 투입해 공사를 진행하는데 이같은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대부분 시공사가 책임준공을 확약한 지식산업센터나 물류센터 등 비주택 사업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한 자산신탁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강서구 마곡동 지식산업센터 등 사업장 3곳에 신탁계정대 약 430억원을 투입했다. 또 다른 신탁사는 계약을 맺은 대우조선해양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하도급 공사대금 등으로 약 190억원의 신탁계정대가 발생했다. 통상 부동산 개발 현장에서는 건설사 책임준공만료일로부터 6개월 이후 신탁사책임준공만료일이 도래하며 공사 기간이 도과하면 1차적으로 시공을 맡은 건설사들이 채무를 인수한다. 그런데 유동성이 고갈된 건설사들이 시공을 포기하면서 신탁사로 위험이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건설사들에 과중한 리스크를 부과하는 책임준공확약을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주택과 달리 지식산업센터나 물류센터 등 비주택 사업장은 분양대금 유입이 없기 때문에 늘어난 공사비를 시공사가 오롯이 부담한다. 여기에 책임준공 기한까지 빠듯하다. 급등한 공사비를 추가 부담하면서 책임감 있게 공사를 이어가도 기한에 맞추지 못하면 몇 백에서 많게는 몇 천억원 단위의 PF 채무를 시공사가 떠안아야 한다. 책임준공에 걸린 채무인수 계약 때문이다. 주택의 경우 분양률을 달성하지 못할 시 15% 내외의 할인분양 수수료와 5% 안팎의 트리거 수수료도 시공사가 부담한다. 분양대금 회수가 어려워지고 대주단 수수료까지 시공사가 지불하는 가운데 공사비까지 급격하게 오르는 삼중고를 겪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