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급증·경제 불안에 ‘극우 약진’ 두드러진 유럽의회 선거, EU 정책 지각변동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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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정치 세력 약진, 독일·프랑스·이탈리아선 압승하기도
난민 급증에 인플레까지 '몸살' 겪는 유럽, '극우 돌풍' 몰고와
유럽의회 지각변동 예상, 이민·환경 정책 변경 불가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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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현지시간)부터 9일까지 유럽연합(EU) 27개국에서 실시된 제10대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의 약진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의 패망에 뿌리를 둔 EU는 지난 수십 년간 우파를 정치적 변두리에 국한시켜 왔지만 인플레이션과 반(反)이민 정서가 극우 열풍에 힘을 실어줬다. 사실상 기성 정치권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이었던 이번 선거에서 주요국의 집권당이 패배하면서 각국은 물론, EU의 정치 지형 전반에 대한 격변이 예고되는 모습이다.

제10대 유럽의회 선거, 강경 우파 ECR·ID 의석수 증가 약진

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유럽의회가 이날 오전 0시 발표한 잠정 예측 결과, 제1당 격인 중도우파 성향의 유럽국민당(EPP)은 전체 720석 중 191석(26.53%)을 확보해 유럽의회 내 제1당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당초 1차 예측 결과에서는 181석이었으나, 개표가 먼저 끝난 회원국 집계 결과 등이 반영되는 과정에서 예상의석수가 더 늘어났다. 최종 개표 결과에서 다소 변동이 있을 수 있지만, 제1당 자리는 안정적으로 지킬 것으로 보인다. EPP도 선거 결과를 두고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뜨렸다.

제2과 3당도 자리는 지켰으나 영향력은 다소 줄어들 전망이다. 제2당인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은 135석(18.75%)을 차지, 의석 비중이 현 의회(19.7%)보다 소폭 줄어들 것으로 관측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르네상스당이 속한 제3당 중도 자유당그룹(Renew Europe)도 현재 102석(14.5%)에서 크게 줄어든 83석(11.53%)에 그칠 것으로 점쳐졌다. 친환경 기후정책 추진에 앞장서며 5년 전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좌파 성향의 녹색당-유럽자유동맹(Greens/EFA) 또한 현재의 71석(10.1%)에서 크게 줄어든 53석(7.36%)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전통적으로 녹색당이 강세를 보였던 곳에서 영향력이 약화된 결과로 해석된다.

반면 강경우파와 극우 성향의 정치 세력은 예고된 대로 약진하며 의석수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압승하거나 확연한 상승세를 보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강경우파 성향 정치그룹인 유럽보수와개혁(ECR)은 현재 69석(9.8%)에서 71석(9.86%)으로, 극우 정치그룹 정체성과 민주주의(ID)는 49석(7.0%)에서 57석(7.92%)으로 의석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현 의회와 비교하면 ECR과 ID 의석 총합은 10석이 늘어날 전망이다.

극우 돌풍, ‘반(反)이민’이 트리거 역할

전문가들은 이민자 급증 및 전쟁으로 고조된 역내 안보 불안 등이 극우 정당의 득세에 무게를 실어줬다고 분석한다. 에너지 위기와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비용 상승으로 인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지불 비용이 급증하다 보니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졌는데 이러한 맹점을 파고든 극우가 반기후·반이민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지세를 획득한 것이다.

특히 이민자 문제는 극우 정당을 경계하는 유권자들조차 현재 유럽 정치의 최대 화두임을 인정하는 사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유럽에서는 반이슬람·반이민 정서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여기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충돌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 등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독일을위한대안(AfD)과 같은 극우 정당들은 반이민과 반이슬람 정서에 편승해 지지도를 확장해 왔고 유권자들은 테러리즘에 대한 두려움과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극우 정당을 통해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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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기존 유럽 정당을 심판하고자 하는 2030 세대 유권자들을 대대적으로 결집한 점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실제로 이번 의회 선거는 기존 정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기존 정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극우 정당에 표를 몰아준 것으로 파악됐다. 프랑스 출구조사에 따르면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은 약 32%의 득표율로 압승이 예상됐다. 이는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을 강조하고, 지금보다 더 강경한 이민정책을 내세우는 우파 세력이 ‘이민자 수용의 고통 감내’나 ‘환경 보호’ 등을 옹호하는 좌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젊은 층에 어필했다는 방증이다.

더욱이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인 AfD가 16.5%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2위 정당에 올라섰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AfD가 최근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약진했다는 점이다. 반면 올라프 숄츠 총리가 속한 사회민주당(SPD)은 AfD에 밀려 3위로 추락하는 대굴욕을 맛봤다.

유튜브나 틱톡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젊은 층을 사로잡은 것도 지지율 상승에 한몫했다. ‘유럽 극우의 새 얼굴’로 불리는 올해 29세인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2030 세대 유권자들에게 각광 받는 차세대 정치인이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만 해도 각각 120만 명, 55만 명에 달한다. AfD 역시 공식 계정 틱톡 팔로워가 40만 명 이상으로, “진짜 남자이자 애국자는 우익” 등 정당 입장을 담은 영상을 제작해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다.

고금리, 고물가도 ‘극우 바람’ 부채질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경기 침체 등도 극우 정당의 돌풍을 불러오는 데 일조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021년부터 에너지 위기와 함께 가속화된 제조업 기반 붕괴와 치솟는 물가를 경험한 유럽의 유권자들이 경기 안정화를 약속한 극우 정치 세력에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가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유럽노동조합총연맹(ETUC)에 따르면 유럽은 높은 인플레이션 대비 낮은 임금 증가율로 지난해 실질임금이 전년 대비 0.7%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유럽 3대 경제 국가인 이탈리아(-2.6%), 독일(-0.9%), 프랑스(-0.6%)도 이같은 흐름을 피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RN을 지지하는 프랑스의 한 대학생은 “집값은 물론이고 매일 먹어야 하는 빵과 치즈, 버터까지 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며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지원보다 당장 프랑스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fD를 지지하는 독일의 한 20대 직장인도 “젊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것이 왜 당연하냐”며 “연금·기후·난민 등 막대한 비용을 젊은 세대에 전가하는 정권을 거부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극우 정치인들은 현 정부를 공격하는 도구로 생활비 의제를 이용했다. 바르델라 프랑스 RN 대표는 “인플레이션은 수백만 명의 프랑스인이 더 이상 대처할 수 없는 벽”이라고 언급했고 지난해 11월 치러진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네덜란드의 트럼프’로 불리는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PVV) 대표가 반이민 정책을 강조하며 저렴한 집값과 고임금 일자리를 원하는 네덜란드 젊은 층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

극우 정당 열풍, 우클릭 기조 강화

이런 가운데 젊은 유권자 사이의 극우 열풍이 EU의 우경화를 장기화 시킬 신호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성인 초기에 형성된 정치적 성향은 평생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며 “미국에서는 공화당 지지자들이 대부분 노년층이지만, 유럽에서는 극우세력이 청년층 표심도 사로잡아 향후 수십 년 동안 지지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유럽의회가 EU의 입법을 비롯해 예산안 심의·확정권 등의 권한을 갖는다는 점에서 극우 정당의 약진은 EU 정책 전반의 우클릭 기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와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등 극우 인사들이 유럽의 이민·환경·젠더 정책 변화에 압박을 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도 밀착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유럽의회의 정치 지형에도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유럽의회에서 교섭단체 역할을 하는 정치그룹은 국적이 아닌 정치 성향이 비슷한 정당 간 결성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중도 좌·우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하긴 했으나 각국의 극우 세력이 약진한 만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역시 연임에 성공하더라도 정책 면에선 우파로 기울 공산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현재 의회에는 1당인 EPP를 포함해 총 7개의 정치그룹이 있지만,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기존 정치그룹 구성이 변동되거나 새 정치그룹이 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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