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전기차 화재에 국민 불안 가중, 정부 “9월 초 안전대책 마련”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 시 열폭주로 피해 눈덩이
정부 안전 대책 방안 마련에 착수, 내달 발표 전망
화재 원인 '배터리', 소비자 정보 공개 의무화해야
최근 잇따른 전기차 화재사고로 국민의 불안이 커진 가운데,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선다. 전기차 화재의 경우 일반 화재와 달리 열폭주로 인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르면 내달 초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 예방을 위한 범부처 차원의 대책이 발표될 전망이다.
화재 진압 장비 확충 및 충전 시설 개선 대책 마련
7일 정부에 따르면 환경부와 소방청 등 관계 부처들은 9월 초 발표를 목표로 지하주차장 화재 재발 방지책 마련에 착수했다. 최근 계속해서 발생하는 전기차 화재 사고에 따른 조처다. 지난 1일 인천 청라동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벤츠 전기차가 폭발하면서 주변 차량 140여 대가 불에 타고 주민 120여 명이 대피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차종은 벤츠 전기차 EQE350로 여기에 탑재된 배터리가 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6일에는 충남 금산군의 한 주차타워에서 주차 중이던 기아 전기차에 불이 붙는 사고도 일어났다. 연이은 사고로 전기차에 대한 공포감이 커지면서 일부 아파트에서는 지하 내 전기차 주차를 제한하고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전기차는 리튬이온배터리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 불이 붙으면 열폭주를 일으켜 불을 끄기 어렵다. 이번 인천 사고의 전기차도 열폭주로 화재 발생 8시간이 넘어서야 완전 진화됐다. 또 지하주차장은 구조상 진입 자체가 쉽지 않아 진화가 더욱 어렵다.
이에 환경부, 소방청 등 관계부처는 이번 화재 사건을 계기로 화재 진압 장비를 확충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전기차 화재 진압에 사용되는 장비는 질식소화 덮개, 이동식 수조, 방사 장치 등이 있는데 이를 확충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지하주차장 안에 설치되는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설비 규정도 살펴볼 방침이다. 인천 지하주차장 현장은 화재가 발생했음에도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다. 현행소방법상 지상 6층 이상 규모로 건축된 업무시설은 모든 층에 스프링클러 설비를 갖추도록 하고 있지만, 이는 2018년 이후 지어진 건물만 적용하고 있다. 구축 건물에 대한 스프링클러 설치는 의무가 아니다.
전기차 배터리와 충전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도 마련한다. 환경부는 2024년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에서 배터리 불량 상태 등 차량 상태 전반을 자가 진단할 수 있는 차량정보수집장치(OBD)를 탑재할 경우 배터리안전보조금을 20만원 추가 지급하도록 했다. 충전시설의 경우 급속충전기보다 완속충전기가 화재 위험이 높다는 점을 고려했다. 급속충전기는 배터리 용량의 80%까지 충전되면 중단되지만 완속충전기의 경우 100%까지 충전할 수 있어 사고 위험이 더 높다. 아울러 정부는 정확한 화재 원인 조사 결과가 나오면 소방시설 관련 규정 중 미흡한 사항을 살펴보고 보완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시·행안부의 ‘안전 매뉴얼’, “현실성 떨어져”
서울시와 행정안전부도 ‘전기차 화재 안전 매뉴얼’ 등 화재 사고 예방을 위한 대책을 서둘러 내놨다. 5일 서울시는 25개 자치에 공동주택 전기차 화재예방 및 안전관리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이는 앞서 행안부가 서울시를 포함한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안전관리 협조를 요청한 데 따른 조치다. 이번 조치로 서울 자치구 내 공동주택 관련협의체나 아파트 관리사무소에는 공동주택 전기차 화재대응 행동요령, 화재대응 매뉴얼 등이 보급될 예정이다. 해당 매뉴얼은 지난해 말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제작했다. 주요 안전관리 사항은 전기차 충전·소방·안전시설 등 현황 파악, 체크리스트 점검 및 관리다. 전기차 충전시설 설치 권고사항과 이용 시 주의사항 등도 포함됐다.
그러나 해당 매뉴얼 내용이 대부분 일반적인 내용이거나 현실적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전기차 충전구역 지상·지하 설치 시 고려사항이다. 매뉴얼에 따르면 충전시설을 지상에 지정할 때는 △옆 건물과 10m 이상 △놀이터, 유치원, 노유자시설 등과 20m 이상 △쓰레기 처리장 등 가연물 보관장소 등과 20m 이상 △소나무·잣나무 등과 같은 나무 아래 제한 △소방대 접근이 용이한 지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 지하 주차장에 충전구역을 설치할 때도 안전 고려사항이 까다롭다. 주요 항목은 △옥외에서 직접 접근이 가능한 장소 △지하 3층 이하는 설치 제한 △주동 출입구 또는 피난통로 10m 이상 이격 △창고, 발전기실, 전기실 등으로부터 10m 이상 이격 등이다.
전기차 주차·충전시설 설치는 의무사항이다.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100가구 이상 신축 공동주택은 주차 대수 5% 이상, 2022년 1월 28일 이전 건축허가를 받은 아파트는 2% 이상 범위로 전기차를 포함한 친환경 자동차 전용주차구역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아파트 단지에서 지상이든 지하든 매뉴얼 안전사항을 모두 충족한 시설을 설치하는 게 어려운 실정이다. 국내 아파트 현실을 감안한 현실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中 배터리 탑재로 드러난 벤츠 민낯, ‘배터리 제조사’ 공개해야
소비자들 사이에선 차량에 탑재된 배터리 제조사에 대한 ‘알 권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배터리가 전기차 안전과 직결되는 핵심 부품임에도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정보에 대해선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벤츠 EQE350 차량 화재도 배터리에서 비롯됐다. 당초 EQE 모델에는 글로벌 1위 배터리 업체인 중국 CATL의 배터리가 탑재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 화재를 계기로 ‘파라시스’의 배터리를 탑재한 사실이 드러났다. 해당 배터리는 니켈·코발트·망간(NCM) 타입으로, 정확한 모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대명사인 벤츠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기업의 저가 배터리를 탑재했고, 이 차량이 화재의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심지어 해당 배터리는 중국 현지에서도 불안정한 품질로 도마 위에 오른 제품이다. 2021년 3월 중국 국영 베이징자동차그룹(BAIC)이 파라시스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 3만1,963대에 대한 리콜을 시행했는데 ‘특정 환경에서 배터리 화재 발생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에도 벤츠가 파라시스를 채택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사실상 벤츠가 자사 전기차 원가 절감에 더 치중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산 NCM 배터리는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제품 대비 30%가량 저렴하다. CATL의 경우 국내 3사 배터리보다 20%가량 저렴한 것으로 파악된다. 통상적으로 배터리가 전기차 한 대에서 차지하는 원가 비중은 약 40% 수준이다. 1억원을 웃도는 고가의 프리미엄 완성차 브랜드의 전기차가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만큼, 가격 경쟁력이 아닌 원가 절감에 신경 썼다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