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사이클 올라탄 K-조선, ‘국내 빅3’ 이익 2조 예상 ‘잭팟’
클락슨리서치 신조선가지수 '189.7', 2008년 이후 최고치
환경 규제로 교체 수요 급증, 컨테이너선 가격도 2배 껑충
조선업으로 번진 미중 갈등에 반사이익 기대도
새로 건조하는 선박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뛰면서 국내 조선업계가 미소 짓고 있다. 글로벌 환경 규제에 따라 친환경 선박 수요가 증가한 데다 25년 주기의 선박 교체 시기가 맞물린 결과다. 여기에 미국의 중국산 선박 제재 가능성도 커지고 있어 반사이익에 따른 실적 확대도 기대된다. ‘달러박스’로 통하던 시기가 16년 만에 재현되는 모습이다.
선박 가격 급등, ‘신조선가’ 사상 최고치 목전
11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시장조사기관 클락슨리서치의 ‘신조선가지수(Newbuilding Price Index, 새로 건조하는 선박 가격을 지수화한 것)’는 6일 기준 189.7을 기록했다. 역대 최고치인 2008년 9월(191.6) 이후 16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로, 업계는 이를 3차 슈퍼사이클(초호황기) 진입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조선업 시황을 판단하는 대표 지표인 신조선가지수는 오를수록 해당 시점의 선박 가격이 높다는 뜻이다.
신조선가지수는 2008년 9월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1960년대에 이은 2차 슈퍼사이클인 2005~2008년은 글로벌 경기가 좋았던 데다 ‘세계화’ 물결을 타고 물동량이 대폭 늘면서 선사들이 경쟁적으로 배를 발주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업은 건조 물량을 쓸어 담아 달러박스로 불렸고, HD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조선업체들도 일제히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초래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자 신규 발주량도 추락했다. 그렇게 시작된 불황은 10년 이상 이어졌다. 선박 가격이 오르기 시작한 건 2021년부터다. 오랜 기간 새 배를 들이지 않은 선사들이 경기 회복 신호를 읽고 신규 발주에 나선 영향이다.
환경규제 강화로 친환경 선박 수요 폭증
이번 3차 슈퍼사이클은 주도한 것은 친환경 선박이다. 글로벌 해운사들이 탄소중립 목표를 지키기 위해 저탄소, 무탄소 등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는 대체연료와 친환경 선박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해사기구(IMO)의 ‘온실가스 감축 전략 개정안’에 따른 것으로, 지난 2021년 IMO는 오는 2030년까지 발주하는 선박을 대상으로 2008년 발주 선박 대비 탄소 배출량을 40% 감축하고 2050년에는 50%까지 감축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선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에 글로벌 해운사들은 액화천연가스(LNG), 메탄올, 수소 등을 연료로 쓰는 친환경 선박을 잇달아 발주했고 그 덕에 글로벌 선박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7만4,000㎥짜리 LNG 운반선의 경우 지난달 말 기준 척당 건조 가격은 2억6,200만 달러(약 3,500억원)로 2020년 12월(1억8,600만 달러)보다 40.9% 뛰어오른 상태다.
친환경 선박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시장을 장악해 온 국내 조선 3사(HD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한화오션)도 모처럼 활짝 웃고 있다. 국내 조선 3사는 글로벌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에서 발주량의 64%를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멤브레인(membrane, 사각형) 타입의 LNG 수송선박은 전체 수주량 중 89%를 점해 양보다 질로 승부를 본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조선 3사가 쌓아둔 수주잔량은 3년 6개월~4년 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조선사는 최소 2년 치 일감을 갖고 있어야 도크(dock·선박 건조장)를 놀리지 않는 만큼 수주잔량 마지노선을 2년으로 잡는데 이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 같은 수주잔량 포화는 조선사의 이익 증대로 이어진다. 비싼 배만 골라잡는 ‘선별 수주’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조선사들이 LNG 운반선이나 암모니아 운반선(VLAC) 등 고부가가치 선박 수주에 힘을 쏟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크 포화 현상은 평범한 선박인 컨테이너선 가격도 끌어올렸다. 1만5,000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 컨테이너선 가격은 2020년 12월 척당 1억600만 달러(약 1,420억원)에서 지난달 2억200만 달러로 두 배 가까이(90.5%) 올랐다. 컨테이너선은 중국의 저가 공세로 인해 좀처럼 수익을 내기 힘든 선박이었지만 뱃값이 오르면서 국내 조선사들도 수주전에 동참해 이익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불황의 터널을 뚫고 나온 조선 3사의 이익도 수직상승하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은 2021년 1조3,848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지만, 지난해 흑자를 낸 데 이어 올해는 1조3,533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중공업의 올해 이익 전망치도 4,619억원으로 지난해(2,333억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1,965억원 적자에서 올해 2,100억원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갈등에 따른 반사이익도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도 국내 조선업계에 있어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 조선사에 관세 부과 등 제재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현재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미국 전미철강노조(USW) 등 5개 노동조합의 청원을 받아들여 중국의 해양·물류·조선업에 불공정 무역 관행 관련 무역법 301조 조사를 진행 중이다. 중국 정부가 세계 조선, 해양, 물류 산업을 장악하기 위해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춰 시장 점유율을 장악하고, 전 세계에 항만과 물류 시설망을 구축한 뒤 미국 선박과 해운사를 차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중국 조선사들은 정부의 선박 금융 지원과 저렴한 원가를 기반으로 수주 점유율을 확대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지난해 역시 중국 조선사는 글로벌 조선사 인도량 6,447만 GT 중 3,280만GT(50.9%)를 인도하며 1위를 차지했고, 이어 한국 조선사가 1,832만 GT(28.4%), 일본 조선사가 994만 GT(15.4%)를 기록했다. 반면 미국 조선사는 61만 GT로 전체 인도량의 0.1%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 속 미국 정부가 중국 조선사에 대한 제재를 확정할 경우 글로벌 선박 시장에서 중국과 1, 2위를 다투고 있는 한국 조선사의 반사이익이 예상된다. 미국이 단기간 내에 조선 건조량을 늘리기는 쉽지 않은 만큼 한국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어서다. 특히 미국 수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LNG 수송을 위한 가스운송선 수주 확대가 예상된다. 미국은 지난해 9,120만 톤의 LNG를 수출한 세계 1위 LNG 수출국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 천연가스 수급이 불안해지면서 미국산 가스의 수요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에 성공할 경우 친환경 정책 폐기에 따른 수혜도 점쳐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선 시 각종 친환경 정책을 폐기하고 화석원료 등 저렴한 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녹색 사기'(Green New Scam)로 규정하고,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의도다. 미국이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화석 연료 중심으로 투자를 확대하면, LNG 등 국내 조선업계가 주력하고 있는 선박 발주도 증가할 것으로 관측된다.
여기에 2027년 IMO의 탄소세까지 시행될 경우 고부가 친환경 선박 수주 속도도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IMO는 오는 2025년 10월 탄소세 최종안을 채택하고, 2027년 발효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이는 선박 교체 주기와도 맞아떨어진다. 현재 운항 중인 선박의 절반 이상은 2000년대 초에 건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선박 교체 주기는 보통 25년 정도로, 탄소세를 피하기 위한 친환경 선박 도입 시점과 노후 선박 교체 타이밍이 내년 이후 맞물리는 셈이다. 이 경우 슈퍼사이클 기간은 더욱 길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