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이시바 ‘전략 오판’으로 참패, 자민당 독주해 온 일본 정치 격랑 불가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조기 총선, 승부수 아닌 '자충수'
정치 문제보다 경제에 관심 높은 민심 못 읽어
야당 노다 대표, 비자금 비판하며 중도 성향 유권자 포섭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단독은 물론 공명당과의 연립으로도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이로써 2012년 정권 재탈환 후 12년간 지켜온 자민당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이달 초 취임한 이시바 총리는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결과는 ‘자충수’가 된 모양새다.
日 여당, 단독 과반 확보 실패
27일 NHK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선거에서 집권당인 자민당은 191석을 차지해 단독 과반을 달성하지 못했다. 연립 정당인 공명당 의석 수 24석을 합치면 215석으로, 중의원 465석의 과반(233석)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두 정당의 선거전 의석 수는 각각 247석, 32석으로 총 279석이었다.
반면 입헌민주당은 전체 의석 수 465석 가운데 148석을 차지했다. 현재 의석 수인 98석을 훨씬 웃도는 성과다. 입헌민주당은 과거 민주당 시절을 포함해, 2012년 자민당에 정권을 뺏긴 뒤 네 차례 선거에서 57~96석에 그쳤다. ‘세 자릿수(100석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한 입헌민주당은 명색이 제1 야당이면서도, 200석 중·후반을 차지한 자민당과는 양당 구도라고 하기에도 초라한 게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지금의 선거 제도 아래서 일본의 제1 야당이 전체 의석 수의 30% 이상을 차지한 것은 2003년 신진당(156석)과 2003년 민주당(177석) 두 차례밖에 없다”며 “민주당은 2003년의 약진을 발판 삼아, 2009년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었다”고 보도했다. 입헌민주당이 이번 총선 약진을 토대로 정권 교체에 도전할 수 있다는 평가다.
입헌민주당 노다 ‘우클릭’, 중도층 표심 잡기 성공
일본 현지 언론들은 ‘입헌민주당의 우클릭(보수화)’ 전략이 중도 성향 유권자를 성공적으로 끌어왔다고 분석한다. 입헌민주당 내 가장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꼽히는 노다 요시히코 대표는 3년 전 총선 때와 정반대 전략을 택했다. 3년 전엔 지역구마다 일본공산당과 후보를 단일화했다가 강경 좌파에 거부감을 느끼는 유권자의 외면에 참패했지만, 이번엔 선거 협력을 하지 않고 일본공산당과 거리 두기를 했다.
노다는 지난달 대표로 취임한 직후 의석 수 98석에 불과한 입헌민주당으로선 무리하다고 여겨졌던 목표인 정권 교체를 내걸고, 집권 여당 자민당의 비자금 스캔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다른 야당과는 협력하지 않고 ‘입헌민주당의 길’을 고집해 성과를 냈다. 일본 정계는 장기 집권 중인 자민당이 싫어진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노다가 이끄는 우클릭 입헌민주당에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고 진단했다. 60~70대 유권자의 비례대표 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이 자민당을 근소하게 앞섰다는 일본 언론의 여론조사가 나오는 배경엔 이런 ‘안정감’이 컸다는 것이다.
지바현 출신인 노다 대표는 자위대의 자위관 아들이며, 명문 정치 학교인 마쓰시타 정경숙(政経塾) 1기 출신이다. 입헌민주당 정치인이지만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노다 대표는 “A급 전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전쟁범죄자들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선이 굵은 정치를 하는 인물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国葬) 때는 민주당 출신의 전 총리로선 유일하게 참석했으며, 자민당의 요청을 받아 국회에서 아베 추도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번 총선 승리로 노다 대표는 ‘아베에게 정권을 뺏긴 총리’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와졌으며, 입헌민주당 내 입지도 한층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희석 위한 선거
한편 새 정부 출범 27일 만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조기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결단한 이시바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번 중의원 선거는 사실상 지난해 집권 자민당에서 불거진 파벌 의원들의 정치 비자금 파문에 대한 국민 심판을 받는 자리였다. 자민당이 이시바 총리로 ‘당의 얼굴’을 바꾼 것도 비자금 스캔들을 희석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 개혁안을 내놓지 못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비자금 연루 의원 40여 명이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민당 혹은 무소속으로 선거 출마를 강행한 데다, 자민당 본부가 공천 배제된 의원의 소속 지부에 당 활동비 2,000만 엔(약 1억8,000만원)을 지급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참패로 이어졌다.
자민당·공명당이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놓친 기저에는 장기간 지속된 경제 부진과 고물가, 실질 임금 감소로 팍팍한 민생의 불만도 깔려 있다. 교도통신이 1∼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5.9%가 새 내각의 우선 과제(복수응답)로 ‘경기·고용·물가 대책’을 꼽았으며 이어 ‘연금·사회보장’(29.4%), ‘육아·저출산’(22.7%)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유권자들의 관심이 정치 문제보다 먹고사는 데 집중돼 상황에서 이시바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내놓은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등의 공약이 먹힐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이에 자민당 내부에서는 이시바 총리 사퇴론이 거세지고 있다. 이날 현재 취임 28일이 된 이시바 총리의 사임이 이뤄질 경우, 역대 최단명 정권 기록을 새로 쓸 수도 있다. 앞서 일본에선 1994년 비자민당 소수 정당들이 뭉쳐 만든 하네다 쓰토무 정권이 출범 64일 만에 교체됐다. 자민당 따지면, 1988년 우노 소스케 총리가 취임 69일 만에 사임한 사례가 있다.
자민당 안에서 ‘반 이시바’ 세력들이 결집해 갓 출범한 새 지휘부를 흔들 가능성도 점쳐진다. 특히 지난달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당선자와 막판까지 경쟁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또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을 공개 지지했던 아소 다로 자민당 최고 고문은 당내에서 유일하게 파벌을 해체하지 않았고, 이시바 총리 지지 세력과 날을 세워온 ‘구 아베파’들이 여기에 가세할 경우 이시바 총리를 충분히 흔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취임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이시바 총리가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선거 패배의 근본 원인이 아베 신조 총리 시절부터 누적돼 온 파벌 정치인의 비자금이나 통일교와 유착 의혹 등 자민당의 오랜 적폐로 지적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총리 지명 선거를 위한 새 임시국회가 다음 달 7일 소집되는데, 남은 열흘 동안 당내에서 이시바 총리를 끌어내릴 만한 세력이 결집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